에세이 #67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 친구, 동료, 지인 등 다양한 사람이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는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일생동안 만나는 사람의 수는 대략 17,500~18,000명입니다. 이 가운데 친구가 되는 숫자는 1% 미만입니다.
지금 연락해서 10분 이상 자연스럽게 통화할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소수의 친구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금은 그런 친구들과 만나는 빈도마저 줄어들었습니다.
한 사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 친구 A는 매사에 여유가 넘칩니다. 크게 분노하지 않고 또한 슬퍼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온도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어디쯤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A가 인생을 대충대충 살거나 직장에서 맡은 업무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가 그럴 뿐입니다. 그래서 A는 상대적으로 자신이 이룬 성취에 대해서 주변으로부터 저평가받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노력한 시간을 알아달라고 주변에 떠들고 다니지 않고 열정적으로 자신을 어필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성공에 대해 인색합니다. 그렇기에 주변에서는 A가 열심히 하는 것과 상관없이 크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A는 그런 평가에 대해서도 시종일관 담담하게 생각합니다. 속마음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A가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 다소 억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하니 현실이 원래 그렇습니다. 타인의 성공은 저평가하고 나의 성취는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타인의 고통은 쉽게 공감하지 않지만 타인이 나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경우에는 심한 욕도 하기 일쑤입니다. 인간은 위대하기도 하지만 꽤나 천박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회적 위치와 힘의 역학관계도 결국에는 '인식'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서 어떤 사람으로 나를 인식하고 있는가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작은 배낭과도 같습니다.
과거를 스스로 돌아보면 성장단계별로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내 편으로 만들고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과도한 행동과 농담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며 나름대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2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고 잘하려고 노력한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시간에 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상대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부단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은 결국 '결과'로 평가받습니다. 결과를 만들기 위해 가장 적합한 과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시간에 누군가를 신경 쓴다면 과정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과장된 말과 행동으로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성과는 고사하고 좋게 시작했던 관계라면 미궁으로 빠질 것이고 인연은 딱 거기까지 일 겁니다.
지금까지 2번의 이직을 통해서 3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퇴사 후에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사입니다. 그들과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눈에 보이는 '아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부하는 직원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상사라면 직장생활이 불편하겠지만 오히려 쉽습니다. 비위만 맞춰주면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에.
그러나 진짜 힘든 상사는 아부보다 '실력'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해봤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잘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일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우리가 맺어가는 인간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부로 맺어진 관계보다 실력으로 맺어진 관계가 언제나 오래가고 단단합니다.
둘째,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2020년 이직한 현 직장은 저에게 완전히 생소한 분야였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공 분야도 아니었고 동종 업계에서 일한 경력도 없는 그저 그런 경력직 직원에 불과했습니다. 주변에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저는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무엇이든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알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알았다고 생각하고 뿌듯해하면 모르는 것이 두 개가 나오는 약간은 참담한 상황을 종종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업무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처음 살아보는 저로서는 모르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며 한 순간을 넘어가면 언젠가는 내가 가진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저는 그 순간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저 솔직하게 말하고 하나씩 알아가고자 애쓸 뿐입니다.
대학교 3학년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정부 정책 중 한 가지를 선택해서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조별 과제를 마무리하며 학기말 발표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날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초여름을 지나는 6월이었고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제가 발표를 하며 젠더(gender)와 어젠다(agenda)를 혼동해서 사용했습니다. 수업 특성상 어젠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데 저의 무식함으로 혼용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교수님 : 학생, 젠더와 어젠다는 의미가 다르고 무엇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완전히 다른 개념인데 함께 쓰는 이유가 있는가?
토파즈 : 아, 젠더와 어젠다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는 칼럼을 보았는데 그것을 근거로 삼아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인지...)
교수님 : 아, 그런가? 그렇구먼. 나도 한 번 다시 확인해보겠네. 수고했으니 들어가게.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얼마나 무식한 발언인지. 수업을 마치고 오늘 하루 넘겼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분식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거나하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일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가끔씩 생각납니다. 교수님이 젠더와 어젠다를 모를 리 없고 제가 내뱉은 답변은 말인지 된장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아무 근거도 없는 헛소리였기 때문에 교수님 입장에서 크게 쏘아붙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는 한마디는 '나도 한 번 다시 확인해보겠네.'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식한데 용감했던 학생의 발언을 듣고 알면서도 한 번 더 확인하겠다고 말씀하신 교수님께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분의 배려가 저 스스로 무식함을 인정한 계기가 되었고 그 후로 모르면 모른다고 말합니다. 당장 조금 부끄럽더라도 나중에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어느 분야든 자신만의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한 사람은 비슷한 특성이 있습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갖고 있으며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서 자기 의견이 있습니다. 또한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차별화하는 자신만의 큰 강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평가에 상대적으로 초연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선뜻 말합니다. '친구 합시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타인의 평가에 초연하고 고고한 사람으로 삶을 살아가고 싶지만 어디 그게 쉽습니까? 저 같은 범인은 주변에서 칭찬하면 크게 기뻐하고 조금이나마 싫은 소리를 하면 시무룩하기 일쑤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상호작용하며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일상입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설정하고 스스로 정의하는 나만의 정체성을 구축합니다. 나와 내 주변을 조금이나마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타인이 나와 맺은 관계가 후회되지 않도록 애쓰는 삶. 어쩌면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