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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Feb 23. 2023

질투의 끝

언어의 장면

프루스트를 읽는다는 것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해 한 가지,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면 바로 죽음과 사랑이다. 그의 집요한 사랑과 죽음의 가닥은 질투라는 단어에서 묶인다. 프루스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사랑은 두 시간 또는 두 시간 반 전의 이야기를 회상하게 만들고, 두 시간 또는 두 시간 반 행복하게 하며, 두 시간 또는 혹 두 시간 뒤에도 생각나게 한다. 사랑은 질투를 동반하고 결국 죽음에서 끝나거나 기억의 연료가 탈 때까지 나아간다.      


‘질투의 끝’은 1896년 스물다섯의 프루스트가 출간한 첫 작품인 ‘쾌락의 나날’ 중에서 선정된 네 편의 소설을 묶은 책이다. 책을 번역한 번역가는 이 소설들이 “다분히 미숙하고 종종 속물적 허영까지 엿보이는 초기 작품이지만, 독자들은 그 속에서 미처 꽃피우지 못했지만 앞으로 만개하게 될 프루스트의 밑그림을 볼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번역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 속에서 어떤 미숙함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책 속 단편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밑그림이 됐을 것 같다. 그러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않고서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만큼 프루스트의 생각이 잘 녹아있고, 세심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소설에서 하나의 소설로 건너가는 길은 왕복 차선이다. 덕분에 ‘질투의 끝’을 통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엄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밀도 짙게, 완성도 높게,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감상할 수 있다.      


특히나, 신화적 원형으로서의 어머니를 향한 사랑, 화류계 여인 오데트에 의해 구속된 스완의 사랑, 죽어도 죽지 않는 연인 알베르틴에 대한 마르셀의 사랑과 같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사랑의 단상들과 그 전개 구조가 ‘질투의 끝’에서도 프랑수아르를 향한 오노레의 사랑으로 변주되고 있다.     


엘리자 가보트라는 미국의 비평가는 “특히 작가는 프루스트를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 다른 모든 것을 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읽지 않은 것에 대해 거의 자랑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프루스트 소설의 난해성 때문이 아니라 그 길이 때문일 것이다. 높은 속도감, 수려한 문장, 심오한 담론, 그렇지만 프루스트의 소설은 너무 길다. 이런 연유로 4개의 단편으로 묶인 이 소설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프루스트의 소설 속, 복잡하고 처절하면서도 집요한 사랑의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아토포스(Asopos)일 것이다. 아토포스란 예측할 수 없는, 그래서 특정하거나 분류될 수 없는 사람을 뜻하며, 고대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한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프루스트는 통제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을 질투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질투란 사랑의 가장 역동적인 버전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새 들어와 있었고, 일단 자리를 차지하면 쫓아낼 방도가 없었다. 주의력을 총동원해서 지키고 있어도 한순간 긴장이 풀린 통에 문은 기습적으로 개방되었고, 이미 침입당한 뒤에 그 문이 다시 닫혔으니, 결국 밤새도록 그 끔찍한 동반자와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철학자 한병철은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라는 말로 에로스(사랑)의 아토피아(아토포스의 명사형)를 표현했는데, 에로스가 포로스라는 방책의 신과 페니아라는 결핍의 신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인 만큼 그 닿지 않는 신화적 특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존재하고 시도하고 창조해야만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프랑스인의 사랑과 독일인의 사랑     


사랑을 구조적으로 분석한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는 두 가지 사랑이 비교된다. 첫 번째는 독일인의 사랑이다. 독일인의 사랑이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의 베르테르와 같은 사랑이다. 이는 닿지 않는 사랑이고 끊임없이 흐르는 사랑이며, 그래서 완전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이다. 두 번째는 프랑스인의 사랑인데, 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마르셀의 사랑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사랑했던 연인 알베르틴이 죽은 후, 그의 사랑도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그녀가 과거 한때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는 풍문을 접하고는 다시 한번 불같은 질투에 휩싸인다. 이것이 프랑스인의 사랑이다. 사랑은 대상에게 가 닿아야 하고, 그 사랑은 되돌아와야 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질투를 동반한다.     


의문이 생긴다. 알베르틴은 죽고 없는데, 마르셀이 질투하는 그 대상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小 타자(the other)로서의 알베르틴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런 프랑스인의 사랑을 사랑의 주체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小 타자’와 ‘大 타자’ 간의 구조로서 이해했다.      


‘질투의 끝’에서는 임박한 죽음, 소멸해가는 주체로서의 오노레가 결국 닿지 않는 사랑, 독일인의 사랑,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며 스스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죽기 전 2초라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     


“그렇다. 죽어서도 난 내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내 육신의 욕망, 관능의 욕구, 질투에서는 벗어나리라. 그래서 말했다. ‘하느님, 제가 완전한 사랑을 알게 되는 순간을 허락하소서. 하루빨리 그때가 오게 하소서.’”     


막장과 멜로 사이   


한편,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구조를 ‘욕망’과 ‘몸’으로 비교했는데, 우리는 시간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자명종을 분해하는 아이처럼, 욕망의 무의식적인 원인이 상대방의 몸에 있다는 듯이, 그 사람의 몸을 뒤지곤 하지만, 욕망의 원인은 상대방의 몸, 즉 大 타자에 있지 않고, 진실은 바로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루스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린 시절 나는 성서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도 노아보다 더 불운한 운명인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홍수로 40일 동안이나 방주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는 종종 병에 걸렸으며, 또한 끝없이 많은 날들을 일종의 ‘방주’ 속에 머물러야 했다. 그제야 나는 노아가 방주 속에 있었을 때만큼 이 세상을 잘 불 수 있었던 적은 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비록 방주는 닫혀 있었고, 지상에는 밤이 찾아와 있었지만 말이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나의 욕망의 실체를 알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외모와 재력과 기품과 인격과 동작과 눈의 광채와 눈썹과 담배와 술잔을 드는 손가락과 가슴과 엉덩이와 눈썹을 살피지만 결국, 이런 것을 통해 사랑과 욕망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마주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가장 푸대접했던 자기 자신이며, 그것은 바로 방주 안에서 자신과의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발다사르는 자기가 평생 만찬에 초대하기를 게을리했던 한 사람, 바로 자신과 한참 동안 단둘이 누워서 매력적인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발다사르가 용감하게 대화에서 추방한 슬픔이 다름 아닌 바로 그 눈 속에 피난처를 마련한 것 같았고, 발드사르라는 사람 안에서 핼쑥해진 두 뺨과 그 눈만이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랑을 말하고 너는 슬픔을 듣는다.     


‘나는 사랑을 말하고 너는 슬픔을 듣는다’라는 제목의 음악이 있다. 뉴에이지 품의 평범한 연주곡이라 정작 관심을 끌리는 부분은 음악보다는 제목이다. 도대체 사랑과 슬픔 사이에 어떤 번역기가 작동하고 있으며, 사랑이 슬픔으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알고리즘은 무엇일까?     


알고리즘은 근본적으로 언어로 창조되며, 언어는 우리 머릿속에 풍경을 펼쳐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머릿속 풍경은 경험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지된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말하는 ‘나’와 슬픔을 듣는 ‘너’가 얽혀져 있는 풍경은 경험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경험은 직접적인 경험 외에도 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 들은 것 등을 포함한다.     


먼저 소위 막장 드라마에서 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언어를 해석한다면, 우선 남자는 여자 몰래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여자는 이미 알고 있다. 어느 날 카페에서 만난 두 연인,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럴 때 여자는 사랑을 슬픔으로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멜로 드라마. 여자는 암에 걸려 의사로부터 시한부 삶을 통보받았다. 이 사실을 남자는 몰랐다. 여자는 남자의 행복을 위해 이별을 통보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사랑이 더 슬프다.     


막장과 멜로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사랑에 가까울까? 이 질문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뜻은 어느 것이 언어적 기능에 더 접근해 있는가라는 의미다. 먼저 막장에서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멜로에서 여자와 남자는 자기들만의 동일하고 고유한 언어를 소유하고 있다. 이에 대한 프루스트의 표현은 날카롭다.      


“결국, 사랑의 힘으로 그들은, 한 나라의 백성이 자기들만의 무기와 놀이와 법률을 갖게 되듯이 고유한 언어를 갖게 되었다.”     


멜로의 경험과 막장의 경험은 다른 언어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 언어의 구조를 완결시킬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체’와 ‘大 타자’만 존재하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것 사이에 ‘小 타자’가 개입된다. 그러면서 언어의 장면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이 얼마나 맞는 말인가. 난 이 언어의 장면을 알아볼 수 있어”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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