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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Feb 29. 2024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핫핑크 캐리어를 보내주는 길

지난주 명장면 글이 당근 거래 이야기라서, 이번 주에는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써야겠다. 특이한 경험이라 손이 근질거린다.


친정에 애물단지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내 캐리어다. 핫핑크 28인치 대형 캐리어.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10일간 LA로 출장 간 적이 있었는데, 가져갈 소품이 많다고 해서 큰 캐리어를 샀었다. 이건 실수였다. 내 짐과 일할 때 필요한 소품들까지 넣었는데도 공간이 여유롭게 남았고, 그 이후로 해외여행을 갈 때도 딱히 이렇게 큰 캐리어를 가지고 다닐 일은 없었다.


그래서 본가에 살 때 내 방 한구석에 방치해 두었다. 이후 원룸에서 자취를 하다 바로 결혼을 하게 되면서 캐리어는 부모님 옷방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 작은 신혼집에 두기에는 너무 몸집이 컸던 탓이다. 엄마에게 짐을 맡긴 것 같아 계속 마음이 쓰여, 이번에 이사하는 김에 드디어 캐리어를 처분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주말에 양가 부모님이 집들이를 오셨을 때 엄마에게 캐리어를 받았다. 오염된 부분을 열심히 닦고 당근에 올렸다. 앞에 긁힌 자국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저렴한 가격에 올렸더니 30분 만에  바로 연락이 왔다. 이틀 후 월요일 점심에 거래하자는 내용이었다. 바로 콜!


거래 당일 날, 혹시 잊으셨을까 봐 약속 시간 30분 전에 메시지를 보내놓았다.


"30분 후에 뵙겠습니다 :)"

"넵"


조금 여유를 부리다가, 마지막으로 캐리어 상태를 한 번 점검하고, 비밀번호를 쉽게 바꿔놓은 후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섰다. 여기까지는 전혀 특이한 사항이 없었다. 재밌는 건 지금부터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2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고, 모자를 푹 눌러쓴 어떤 여자가 쨍한 파란색 대형 캐리어를 끌고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 신기하네. 나도 대형 캐리어인데 저 사람도 대형 캐리어를 들고 타다니. 여행 가나?'


여행을 가나 싶었지만 슬쩍 보니 옷차람이 전혀 그쪽은 아니었다. 상당히 쌀쌀한 날씨였는데 가벼운 츄리닝만 입은 차림이었다. 그럼 여행 아닌데. 캐리어를 끌고 집 앞에 마실 나가는 차림으로 나간다? 이건 100% 당근 아니겠는가.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내심 궁금해하며 밖으로 나가 약속 장소 앞에 서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핫핑꾸 캐리어야


"도착했습니다."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OOO역 지났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이고 아저씨, 지금 거기 지났으면 15분 기다려야 하는데요. 추운데 가볍게 입고 나왔더니만! 30분 전에 연락했을 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건물 옆쪽에 바짝 붙어서 기다렸다.


그러다 심심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까 그 여자가 내 옆으로 4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쨍한 파란색 캐리어를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핸드폰 하는 척 소심하게 찍어보았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같은 건물 앞에서, 한 명은 핫핑크 대형 캐리어를 두고 서있고, 저~ 옆에 다른 한 명은 핫블루 대형 캐리어를 두고 서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저도 궁금합니다만.


거기도 당근하시는 거냐고 넉살 좋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자를 푹 눌러쓰신 것으로 보아 아무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태였을 것 같아서(보통 나는 그럴 때 모자를 눌러쓴다) 말을 걸지 않았다.


당근은 확실한 것 같은데, 내가 거래하는 사람과 저분이 거래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같은 사람이어도 신기하고, 다른 사람이면 더 신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5분가량 지났을 때, 어떤 아저씨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옆에 있던 여자와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곁눈질을 하며 내가 거래하기로 한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애썼다.


그쪽 거래가 마무리될 무렵, 아저씨는 고개를 내쪽으로 홱 돌리더니, 민망한 듯 말씀하셨다.


"아, 제가 다 한 겁니다."


"아, 네. 아하하하!"


웃참 실패. 내 차례가 되자, 아저씨는 캐리어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으시고 바로 계좌로 입금해 주셨다. 그러다 내가 얼굴에 한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걸 발견하셨는지, 머쓱해하시며 말씀하셨다.


"갑자기 멀리 가게 돼서요."


"아~ 그러시구나."


캐리어 2개를 가져가시는 걸 보면 가족과 함께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인지, 이민인지 모르겠지만 부디 좋은 여행 하시길! 별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추억이 깃든 핫핑크 캐리어를 보내는 게 서운했는데, 다행히 '파랑이' 친구가 있어서 덜 외롭지 않을까 싶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오피스텔,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 2명에게 대형 캐리어를 받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닐 것 같은데. 그것도 핫핑크와 핫블루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주 명장면에 이거 써야징~'


#이번 주 명장면: 새 주인을 기다리며 나란히(그러나 멀찌감치) 서있는 핫핑크 캐리어와 핫블루 캐리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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