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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Feb 22. 2024

어느 비 오는 날의 당근 거래

아주머니의 사연이 궁금해

요즘 새로운 집에 열심히 적응하는 중이다. 오늘은 이사 온 지 7일 차 되는 날. 엄마의 엄청난 청소력 덕분에 90%의 짐 정리가 이사 당일에 끝났고, 그다음 날부터 남편과 조금씩 정리해서 지금은 집이 깔끔해졌다.


물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이사 오기 전에 처분하지 못했던 물건들을 당근마켓으로 파는 것. 그래서 요 며칠 쉬지 않고 당근 거래를 하고 있다. 남편이 여덟 페이지만 풀고 고이 새 책으로 모셔둔 토익 책도 팔았고,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고체물감도 팔았다. 몇 개는 아직 진행 중.


당근에 내놓으려고 집안 곳곳을 뒤지다 보면 종종 나에 대해 잊고 있던 사실들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기도 한다. 지난 일요일에는 그 전날 올렸던 드로잉 펜 세트를 사겠다는 연락이 왔다. 드로잉 펜 세트는 2년 전 내가 취미로 드로잉을 해보겠다며 과감하게 온라인 강좌를 등록하면서 구입한 제품이다. 굵기가 미세하게 다른 6개의 검은색 펜이 들어있다.


아, 나 그림 그리는 거 좋아했었지. 어렸을 때부터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딱히 배우지 않았는데도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종이에 옮기는 것을 잘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창작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는 것과, 색칠만 하면 망한다는 데에 있었다. 그림으로 먹고살려면 창작을 잘해야 하고(그랬다면 웹툰을 그렸을 텐데) 색칠로 작품을 완성시켜야 하는데, 나는 그저 드로잉만 잘하다 보니 내 특기를 직업으로 연결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묻어두고 종종 취미로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다시 배워보려고 마음먹고 2년 전에 드로잉 온라인 수업을 신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일들 때문에 우선순위가 밀리면서 강좌의 절반을 듣지 못한 채로 날렸고, 나에게는 드로잉 펜 세트만이 새초롬하게 남게 되었다.


그때 그렸던 것 중에 제일 좋아하는 앵무새 그림. 그림 몇 개만 사진으로 남기고 스케치북은 버렸다.


좋은 사람에게 가서 잘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주말에 다행히도 '당근!'소리가 울리며 펜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아이디를 눌러 구매자들이 남긴 후기를 보니 평이 좋은 분이었다.


"안녕하세요, 펜 세트 오늘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죄송한데 2천 원은 힘드실까요."


3천 원에 올렸는데 2천 원을 부르다니. 사실 천 원 차이라 상관없지만 나는 이렇게 '당연스럽게 깎아달라고 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지는 않다.


"죄송합니다. 가격 조정은 어렵습니다ㅜㅜ"


"넵 알겠습니다. 저희 딸에게 다시 물어볼게요."


아... 딸 사주는 거였구나. 갑자기 또 마음 약해지네. 2천 원이나 3천 원이나 비슷하니 그냥 거래해야지. (저 말의 진위 여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더 편한지가 중요할 뿐.)


"아닙니다, 그냥 2천 원에 드릴게요!"


"너무 감사합니다. 지금 OO동에서 출발 가능한데요."


그렇게 우리는 약속을 정했다.


몇 시간 후, 구매자분이 10분 일찍 도착해서 검정 패딩을 입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내셨다. 남편과 바로 내려가서 약속 장소인 스타벅스 앞으로 나갔는데, 아무리 봐도 구매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비가 오고 있었고, 우리는 우산 하나를 쓴 채 계속 두리번거렸다.


검정 패딩을 입은 아주머니가 걸어오시길래 '혹시..?' 싶었지만 나를 무심하게 한번 쳐다보시곤 쓱 지나가셨다. 그렇게 몇몇 사람과 또 눈이 마주쳤고, '혹시..?'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저 아닌데요.'라는 시크한 눈빛뿐. 다시 채팅창을 열었다.


'왔는데 어디 계실까요~!'


'입구에 있어요.'


네? 저도 입구에 있는데요... 입구는 하나인데 어디 계시는 걸까. 그때, 경쾌한 '당근!' 소리가 다시 울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OOOO 스타벅스에 있었네요. 제가 가겠습니다."


아하, 약속장소를 착각하고 근처에 있는 다른 스타벅스 앞에서 기다리셨던 거였다. 십 분쯤 지났을까, 자그마한 체구에, 검은색 롱패딩을 목 끝까지 잠그고 패딩 모자를 뒤집어쓴 아주머니 한 분이 종종걸음으로 길을 건너오시더니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저분이네."


남편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비도 오는데 우산도 없이, 먼 거리는 아니지만 고생하셨겠다 싶어 마음이 짠했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펜 세트가 보이게끔 가슴 앞에 꺼내 잡고 스타벅스 바로 옆에 서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우리를 지나치시는 것이 아닌가? 아주머니는 빠른 걸음으로 카페 입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긴가민가 했던 나는 남편의 재촉을 받으며 입구 쪽으로 향했고, 때마침 다시 나온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당근 맞으시죠? 이거 펜..."


"네 맞아요!!"


아주머니는 활짝 웃으며 호들갑스럽게 사과를 하셨다.


"아우~ 죄송해요. 제가 저쪽 스타벅스인 줄 알고... 왜 안 계시지 했다니까요. 너무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펜 세트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건네주었고, 아주머니는 핸드폰으로 계좌 이체를 할 준비를 하시며 말씀하셨다.


"아우~ 딸아이가... 그림을 포기하려고 해서요."


다소 갑작스러운 정보에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이 뭉클해졌다.


'딸이 미술을 하다가 포기하려고 하는구나. 집안 사정 때문일까? 천 원이라도 깎아주길 잘했다.'


혼자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는 나.


"그래서 취미로 계속하라고, 이거 사주는 거예요 호호호."


아주머니는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펜을 구입하는 이유까지 말해주시며 해맑게 웃으셨다.


"오오, 잘됐네요!"


마음 같아서는 응원의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오바인 것 같아서 참았다. 무슨 사연일까? 궁금한 마음을 삼키며 핸드폰으로 입금하시는 모습을 확인하고 인사를 하려는데,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씀하셨다.


"아우~~ 그래도 돈 들어왔는지 확인해보셔야죠옹."


네네, 이런 확실한 거래 좋아요. 잽싸게 입금 내역을 확인하고 아주머니와 밝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아까 나오기 전에 이분의 아이디를 클릭해서 당근 후기를 봤을 때, '잠깐이었지만 엄마랑 얘기하는 기분이었어요'라는 후기가 있어 궁금했는데, 거래 후에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원래 알던 사이처럼 친근하고 웃음이 많으셨던 아주머니.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딸이 좋아하는 것을 지켜주려는 모습이 멋져요.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의 일부분과 잠시나마 연결된다는 것이 당근 거래의 묘미인 듯하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딸이 미술 하다가 못 하게 됐나 봐."


"그러게, 집안 사정 때문에 그런가?"


"그런가 봐, 안타깝네."


"그런데 패딩은 몽클레어 패딩 입으셨던데."


"응?"


몽클레어 패딩은 기본 100만 원이 넘어가는 고가의 패딩이다. 음, 머릿속 소설을 다시 써야 하나. 어쩌면 우리가 완전히 헛다리 짚은 것일 수도. 헛다리 짚은 거면 더 좋고! 어쨌든, 따님이 계속 그림 그릴 수 있길 응원합니다.


#이번 주 명장면: 딸을 위해 비 오는 날도 마다하지 않고 나오셔서 해맑게 웃으시는 아주머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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