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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Feb 15. 2024

미니멀 라이프를 지키기 위한 결투

승자는 누구일까요

드디어 이사가 코 앞이다. 미니멀 라이프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짐이 별로 없어서 이사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옮길만한 큰 짐은 5개뿐이다. 킹사이즈 침대, 2인용 높이 조절 책상, 3단 책장, 이케아 6단 서랍장 그리고 TV. 이 외에 몇 가지 소형 가전제품을 제외하면 다 작은 물건들이다.


그래서 이사가 며칠 후로 임박했음에도 짐을 포장할 상자조차 만들어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간이 여유롭다는 것은 아니다. 쓰지 않을 물건들을 골라 당근으로 나눔 하거나 팔고, 안 읽는 책도 정리하고, 곳곳에 숨어 있는 잡동사니들을 죄다 끄집어내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냥 둘 것인가 버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후줄근한 티나 서랍 속에 나뒹구는 블루투스 리모컨, 더 이상 쓰지 않는 전자기기 설명서 등은 버리기 쉽다.


하지만 남편이 연애 초반에 써준 100개의 캡슐 편지가 들어있는 유리병과, 입으면 입겠지만 손이 많이 갈 것 같지는 않아서 애매한 옷 등,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해야 결정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렇게 이번 주말에도 어김없이 조금씩 물건을 비우고 있는데,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고전 게임 관련 물품들이다. 남편이 작년에 구입한 것으로, TV에 잭을 간단히 연결해서 몇 천 개의 고전 게임을 할 수 있는 신박한 아이템이다. 어렸을 적 했던 버블보블, 남극탐험, 서커스 등의 게임을 할 수 있다. 가격은 고작 몇 천 원. 혹할 만하다.


관련 물품들이 지름 한 뼘 정도 되는 검은색 상자에 담겨 있었는데, 게임 컨트롤러 2개, 게임을 TV에 연결할 수 있는 손가락 2개 굵기의 잭과 케이블, 정체를 알 수 없는 납작한 판 등이 있었다.


남편은 게임을 좋아한다. 나 역시 게임을 좋아한다. 하지만 고전 게임을 지금 굳이 해야 할까. 잠깐이야 추억을 되새길 수 있어 재밌겠지만, 과연 계속하게 될까 싶어 괜히 짐이 되니 사지 말자고 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나랑 재밌게 게임을 하고 싶다며 기어코 샀고, 딱 한 번 해보고는 (당연한 결과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게임 상자는 그대로 책장 속에 자리 잡았다.


쓰지도 않을 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종종 신경 쓰였고, 상자가 있는 칸에서 책을 꺼내려면 상자를 먼저 꺼내야 해서 은근히 번거로웠다. 그래도 남편의 의견을 존중해서 그대로 두었었다. 그러다 이번 주말에 방 정리를 하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방에 있던 나는 소파에 있는 남편에게 소리쳐 말했다.


"오빠, 이거 게임기 버려도 돼? 안 할 거잖아, 그냥 버리자."


"안 돼, 할 거야! 말 나온 김에 해야겠다."


남편은 잽싸게 대답하더니 게임기를 TV에 연결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처럼 혼자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게임 리스트를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스노우 브루스'라는 게임을 시작했다. 눈사람 2명이 돌아다니며 적을 피해 공격하는 게임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같이 게임기를 들고 장단을 맞췄다.


근데 이상했다. 분명히 몇 달 전에 처음 해봤을 때는 화질도 안 좋고 음질도 별로였는데, 오늘 해보니 화질도 좋고 음질도 좋고 매끄럽게 진행이 잘 되는 것이었다. 그때는 배터리를 다 넣지 않아서 그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게임 퀄리티가 좋아졌다. (당황)


<서커스> 저만 어렵나요


남편은 연이어 '서커스' 게임을 시작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리라. 사자를 탄 캐릭터가 앞으로 나아가며 불 고리 사이를 통과하는 게임 말이다. 남편은 타이밍 맞게 열심히 점프하며 1탄을 쉽게 깨고는 나에게 2탄이라는 숙제를 넘겨주었다. 난 점프에 약하다. 3차례나 시도했지만 '악'소리를 남발하다 게임이 종료되었다.


어느새 게임에 몰입한 나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게임기를 남편에게 건네주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잡동사니를 정리했다. 남편은 혼자 철권을 하고 있었다. 철권은 다 아시겠지만, 한 마디로 두 캐릭터가 맞짱 뜨는 게임이다.


누가 누가 잘 싸우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같이 철권 게임해서 내가 이기면 게임기 버리고, 오빠가 이기면 버리지 말자고 해볼까?'


그러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건 내가 불리하지. 철권으로 남편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 순간 남편이 거실에서 소리쳐 물었다.


"이거 철권 해서 네가 이기면 버리고, 내가 이기면 안 버리는 게 어때?"


헐, 내 마음 읽었나? 그렇게 우리는 '게임기를 버리느냐 마느냐'를 놓고 철권 대결을 하게 되었다. 대결은 3판 2 승제. 각자 캐릭터를 고르고, 첫 번째 대결이 시작되었다.


사랑하지만 덤벼라, 남편아


"잠깐만, 시작하면 안 돼. 나 이거 조작하는 거 알아야 돼. 일단 연습이야. 기다려!'


내 캐릭터는 한쪽 구석에 서서, 손으로 얍얍 앞을 찌르고, 쉭쉭 옆차기를 하고, 점프하고 방어하고 혼자 난리 부르스를 치며 싸울 준비를 했다.


게임이 시작되자 나는 앞으로 돌진하며 손가락으로 버튼을 마구 눌러댔다. 주먹을 휘둘러 맞든 발길질을 해서 맞든 한 대만 맞아라 하는 마음으로. 남편도 열심히 했지만, 나의 손놀림에 반격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남편 캐릭터의 빨간 에너지 바가 조금씩 닳더니, 결국 나의 승리로 첫 판이 끝났다.


'하하하, 이겼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신중하게 두 번째 캐릭터를 골랐다. 내 캐릭터는 또 열심히 점프를 해대며 팔과 다리를 연신 휘둘렀다. 하지만 남편도 만만치 않았다. 몇 번 기습 공격을 하더니, 결국 남편이 승리했다. 일 대 일.


"아씨... 마지막 결승이다. 내가 이긴다."


나는 쓸데없는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았기에, 아주 결연한 자세로 세 번째 대결에 임했다. 두 캐릭터가 엎치락뒤치락했다. 나는 힘차게 주먹을 뻗고 돌려차기를 했다. 물론 상대방 기술에 몇 번 당하기도 했다. 박빙의 승부였다. 빨간 에너지 바가 비등비등 닳더니, 대결이 종료되고 남편 캐릭터가 대자로 뻗었다. 내가 이겼다!


"아싸 이겼다! 버린다 이거!!!!'


남편은 자신이 진 게 어이없다는 듯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낄낄거렸다.


근데 게임 재밌네. 순간 넘어갈 뻔. 나는 짐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남편을 보니 또 마음이 약해져 슬쩍 물었다.


"근데 오빠가 갖고 있고 싶으면 그냥 가져도 돼."


"엥? 아냐 버려도 돼! 나도 안 할 것 같아. 나중에 더 좋은 게임기 살래."


그렇게 우리는 나중에 닌텐도 스위치를 사기로 기약하며 고전 게임기를 버리기로 합의했다. 잠깐, 뭔가 당한 것 같은데. 그래도 비싸더라도 제대로 된 게임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일단 바로 사지는 않고 지인에게 있으면 빌려서 해보려고 한다. 몇 번 해보면 사겠다는 말이 쏙 들어갈지도.


나는 게임 관련 물품들을 주섬주섬 모아, 현관에 있는 분리수거 봉투에 넣었다.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저녁에 밥을 먹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기는 게 말이 되나? 남편이 철권에 훨씬 익숙할 텐데. 숟가락을 멈추고 남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아까 게임할 때 일부러 졌어?"


"음?ㅎㅎㅎ"


"뭐야, 져준 거야?"


"몰라!"


남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웃지 마! 실력으로 진 거 다 알아. 진실은 미궁 속으로... 어쨌든 나의 미니멀 라이프를 성공적으로 지켜냈으니 그걸로 대만족이다.


#이번 주 명장면: 철권 대결에서 승리해 환호하는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알듯 말듯 미소 짓고 있는 남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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