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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은 Jul 25. 2020

자신이 있음

어차피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안다는 마음이었다.

켄지를 처음 본 건 2학기의 어느 날이었다. 왜 1학기 때는 한 번도 못 봤냐면 얘가 2학기에 전학을 왔기 때문이다. 학생 수가 많지 않은 신설 중학교여서 누가 전학 오면 남녀 불문 관심이 주목되고 소문이 돌았다. 켄지도 마찬가지였다. 전에 있던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는 말과 완전 날라리라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걔를 복도에서 처음 본 날 나는 생각했다. 마른 체형에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 잘생긴 이목구비와 찡그린 표정까지. 까칠하고 반항적이어 보이는 첫인상이 딱 영화 <크로우즈 제로>의 켄지 같았기 때문이다. (얘를 켄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 후로도 복도에서 켄지를 자주 봤다. 내가 같이 다니던 애들은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 나가서 떠들었기 때문이다. 같이 복도에 나가긴 했지만 나는 딱히 하는 일도, 하는 말도 없었다. 주로 듣고 있다가 웃기면 같이 웃는 정도였다.

 

켄지는 어느새 친구를 많이 사귄 것 같았다. 자기 반 앞 복도에 나와 남자애들 여럿과 놀고 있었다. 활짝 웃는 켄지는 내가 본 처음의 켄지의 인상과 사뭇 달랐다. 걔가 그때 걔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볼 때마다 새로운 얼굴이 보여서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게 됐다. 내 옆에 여자애들은 어느 날부터 켄지에게 말을 자주 걸었다. 얘는 매번 부끄러워하면서도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로 대답을 했다.

 그때부턴 옆에서 대놓고 얘를 관찰했다. 생각보다 상냥하네. 생각보다 목소리가 좋네. 생각보다 천진난만하네. 생각보다 장난기가 많네. 생각보다 친구들한테 인기도 많고... 생각보다, 생각보다, 생각보다... 잠깐. 언제부터 얘 생각을 이렇게 다양하게 했지? 게다가 나는 내 생각을 뛰어넘는 켄지의 모습에 놀라고 즐거워하고 뿌듯해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얘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저 멀리서 웃고 있는 켄지를 한 번 더 보고는 확신했다. 마음이 콩닥콩닥했다. 여태껏 조용히 서있기만 했던 게 용할 정도로 얘랑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불량식품도 나눠주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나는 결심했다. 얘가 나를 좋아하게 하고 말겠어! 그냥 친해지기만 하기엔 이미 얘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심을 굳히니 마음이 급했다. 고민을 길게 했다간 얘한테 여자친구가 생기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지금껏 얘를 열심히 쳐다보긴 했지만 말 한 번 섞어본 적이 없으니 나를 모를 확률이 높았다. 나라는 존재를 들이대야 했다. 그 날 집에 가자마자 네이트온 친구 신청을 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다들 네이트온부터 접속하고 보는 때였다. 일단 네이트온 친구 정도는 되어야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자기한테 관심 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하는 걱정 따위는 접어둔 지 오래였다. 관심 있음을 최대한 어필하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친구 신청을 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켄지한테 먼저 쪽지가 왔다.      


‘안녕ㅋㅋㅋ 다은아’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리고 “헐 뭐지? 헐 뭐지!!?”라고 소리쳤다. 얘가 나를 알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먼저 쪽지를 보낼 줄은 더 상상하지 못했다. 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답장을 보냈다.     


나 : 안뇽ㅋㅋ 너 나 알아?? 모를 줄 알았는데..

켄지 :알지ㅋㅋㅋ너 쌍둥이잖아 맞지??

나:헐 마쟈. 어떻게 알았어??

켄지 : 애들이 알려줘써ㅋㅋ 나 복도에서 너 맨날 봤는뎅ㅋㅋ

나 : 나도!! ㅎㅎ 그래서 친해지고 싶어서 친구 걸어써....ㅠㅠ

켄지 : 아 진짜?ㅋㅋ 나도 친해지고 싶었어ㅎㅎㅎ 그럼 우리 싸이도 일촌 맺쟈ㅑ

나 : 헐.. 조치! ㅠㅠ

켄지 : 일촌명 뭐로 할래???

나 : 너가 정해ㅋㅋㅋㅋ

켄지 : 아 모야~ 같이 정해 그럼!

나 : 아냐 진짜 너가 정해ㅋㅋㅋ난 아무거나 괜차나

켄지 : 흐음...ㅋㅋㅋ 알게쒀 그럼 정해서 보낼 테니까 받아줘!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쪽지를 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자 한 자를 적어야 했다. ㅋ 개수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도록 신경 쓰면서. 그 와중에 적절하고도 신박한 일촌명을 창조해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걔가 일촌신청을 보냈다. 뭐라고 했을까..?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열어보았다.     


켄지 님께서 이다은 님과 일촌맺기를 희망합니다.

아래 일촌명으로 신청하셨습니다.     


켄지(죽기1초전까지)-이다은(죽기1초전까지)     


일촌을 맺으시겠습니까?


와..우.. ‘죽기 1초 전까지’라니.. ‘일촌명 추천’을 검색한 게 분명했다. 지식인 답변에 있던 100 개 정도 후보에서 일단 거르고 보던 일촌명이었는데. 취향의 차는 둘째치고 너무나 강렬한 이 일촌명이 갓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우리에게 가당키나 한가 싶었지만 이것이 켄지의 마음인가 하는 희망도 함께 떠올랐다. 죽기 1초 전까지 함께 할 사이가 되겠다는 건가!!!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일촌신청을 수락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매일 네이트온으로 쪽지를 주고받았다. '내일은 만나면 인사하기다!' 로그아웃할 때마다 약속했지만 이상하게 복도에서 마주치면 걔도 나도 인사를 못 했다. 멀리서부터 서로를 의식하다가 재빠르게 눈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부끄러워서 그러기도 했지만 얘와 내 사이가 왠지 모르게 비밀스러웠기 때문이다. 얘는 점점 노는 친구들과 어울렸지만 나는 여전히 안 노는 애였다. 같이 다니는 애들과 도통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나는 다혜 말고는 누구에게도 켄지 얘기를 하지 않았다.


켄지와 나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내 주위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과는 분리된 독립적인 사건이었다. 같이 다니는 애들 사이에서 자신 없이 구는 나도 얘 앞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난 점점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게 되더라도 얘는 쭉 좋아할 예정이었다. 얘도 그럴 거란 확신이 있었다. 나는 상냥하고 재밌고 예뻤다. 적어도 얘한텐 확실히 그랬다. 매일 몇 시간씩 주고받는 쪽지와 서로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몇 번이나 마주치는 눈빛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발전되어가는 우리 사이가 너무 기뻐서 나는 매일 싱글벙글 웃었다.      


하루는 켄지와 비밀스러운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아주 건전하고 바람직한 스터디의 탈을 쓴 데이트였다. 일의 발단은 역시 네이트온 쪽지였다. 시험공부하기 싫다며 징징대던 켄지가 넌 공부 잘해서 좋겠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부를 가르쳐줄까 하고 물었다. 주말이었으니 학교 밖에서 만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너네 동네까지 갈게!”라고 보내 놓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가방을 바리바리 싸고 있었다. 그런데 켄지는 살짝 당황한 듯했다. 오늘은 어렵고 내일 학교에서 일찍 만나는 거 어떠냐는 쪽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덧붙인 한 마디. “너 정말 나 좋아하는구나?”


“뭐래~ㅋㅋㅋ”하면서도 그 말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안다는 마음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감이 풀로 충만하였는지 모르겠다. 이후 더 많은 애정과 표현과 증거 앞에서도 나는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다음 날인 월요일에 아침 일찍 만나기로 했다. 등교 시간보다 무려 두 시간이나 일찍.      


켄지는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나는 일찌감치 엄마 차를 타고 20분을 달려 학교에 와야 했다. 다혜도 불평 없이 이른 등교에 함께 해주었다. 켄지와 내가 친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계속 신기해하고 응원해주었기 때문이다.


켄지의 반에 들어가자 텅 빈 교실에 얘만 혼자 앉아있었다. 우리는 서로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한 교실 빼고는 불이 모두 꺼져있는 학교의 분위기가 이 상황의 어색함과 설렘을 배로 키워줬다. 나는 켄지 앞자리에서 뒤를 돌아 앉았다. 우리는 쑥스러운 와중에도 사회와 과학 책을 펼쳐서 진짜 공부를 했다. 공부라기 보단 수업에 가까웠지만. 켄지가 모르겠다고 하는 부분을 짚으면 내가 설명을 해줬는데 완전 잘 아는 부분도 있었고 잘 몰라서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꿋꿋이 아는 척하며 가르쳐주었다. 중간부터는 틀린 말을 해도 얘가 고개를 끄덕인다는 걸 알았다. 그때부턴 별 부담 없이 설명했다. 설명을 하는 나도 듣는 얘도 왜 하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다른 데 있었다.

한참을 시시덕거리는데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학교에 일찍 오는 애들이 한 두 명씩 교실로 들어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남자 교실에 여자애가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켄지도 슬슬 눈치를 보더니 책을 정리했다. 나는 얼른 가방을 싸서 복도로 나왔다. 켄지가 공부 가르쳐줘서 고마워. 하고 인사했다. 계속 붙어 앉아있었으면서 이렇게 가까이에서 인사를 하는 게 새삼스럽게 감격적이었다. 인사를 하면서 슬쩍 손이 스쳤다. 우리 반 교실로 걸어가는데 웃음이 실실 나왔다. 오늘부터 우리가 어떤 특별한 사이가 될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었다. 자신 있었다.    


막상 쓰려니 또 마음이 아파오지만 이 날 이후 나는 켄지와 한 동안 네이트온 쪽지조차 주고받을 수 없었다. 켄지가 계속 네이트온에 접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색빛으로 불이 꺼져있는 걔의 아이디를 보면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그때 난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볼 수도 없었다. 학교에서 켄지와 마주칠 때도 있었다. 나는 아주 멀리서부터 걔를 뚫어지게 쳐다봤는데 걔는 의도적으로 날 피했다. 피할 수 없으면 눈을 내리깔고 지나갔다. 그러는 이유가 뭔지를 당최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걔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무렵, 같이 다니는 애들 중 다른 반이었던 어떤 애와 켄지가 사귄다는 말을 들었다. 애들은 쉬는 시간마다 그 여자애와 켄지를 붙여 세워놓고 꽁냥 거리는 그들을 놀렸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며 아주 축복에 축복을 해주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권력에 넘어간 남자와 뒤에서 슬퍼하는 비련하고도 평범한 여주인공.. 나는 켄지를 너무도 믿었기에 센 언니 같았던 그 여자애에게 켄지가 어쩔 수 없이 넘어간 거라고 확신했다. 한두 달간은 그런 켄지를 안쓰러워하며, 언제 내게 연락을 할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네이트온 로그인을 사수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네이트온 쪽지는 오지 않았다. 점점 걔를 너무 나 좋을 대로 바라봤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드라마 여주인공도 아니고 그냥 점점 더 평범해지는 여자애일 뿐이었다.


그 무렵 같이 다니는 애들과도 조금씩 멀어졌다. 쉬는 시간에도 복도로 나가지 않고 반 친구들과 어울렸다. 거의 1년을 붙어 다닌 애들은 내가 없이도 똑같이 복도로 나가고 신나게 떠들었다. 걔네가 아닌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 그걸 커다란 실패처럼 겁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내가 누구랑 어울리든 나 자체를 좋아할 거라고 믿었다. 켄지는 그 믿음을 저버렸다. 하지만 그 믿음이 되려 나를 살렸다. 내가 얼마나 좋은 애인지를 구체적으로 자신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켄지는 바보가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후로 나는 네이트온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2학기가 끝나고 다시 겨울방학이 찾아왔을 때 오랜만에 네이트온에 접속했다. 교회 언니 오빠들과 한창 재밌게 채팅 중인데 별안간 쪽지가 하나 날아왔다.

 “다은아 안녕ㅋㅋ 잘 지내?”

다들 예상했겠지만 켄지가 보낸 것이었다.


내가 보낸 답장의 내용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 답장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때의 나만큼 자신감 넘치고 멋진 이다은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다시 답장을 보낼 기회를 준다 해도 난 거절할 것이다. 사실 스물한 살에 켄지를 길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걔 얼굴을 보자마자 이 답장이 떠올라 혼자 웃음을 참아야 했다.


 “살아있었네?ㅋ”


그 이후 날아온 켄지의 답장은 상상에 맡기겠다. 왜냐면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 까먹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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