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자마자 바다를 보는 것, 대부분 억새, 덕분에 내려간 체온
제주 2주 여행 2/14
값싼 항공권을 끊어서 제주에 도착하니 밤이 되었다.
10달 만에 다시 찾은 제주.
김녕리에 위치한 숙소에 들어가기 전 저녁을 먹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근처에 장을 보러 왔다가
운 좋게 픽업까지 해주셨다.
이번 제주 여행도 나 혼자 걷는 고독한 사진 여행이다.
이번에는 여행 중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
호텔 대신 게스트하우스 4곳을 예약했다.
첫 번째 게스트하우스는 자보카 게스트하우스.
오션뷰의 신축 건물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비수기 기간이라 게스트는 거의 없었고,
특히 4박이나 연박하는 손님은 나뿐이었다.
아침과 저녁마다 마주치는 스탭들과 많이 친해졌다.
자보카 JABOKA 란 이름은
설마 했던 '자볼까'가 맞다고 한다,
자보카 게스트하우스는 카페도 같이 운영을 하고 있다.
하루 일정을 끝내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맥북을 들고 카페 테이블에 앉아 소등시간까지
서울에서 하던 사진 작업과 글쓰기 작업을 이어갔다.
일어나자마자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이 정말 좋았다.
10월 말, 11월 초의 일출 시간은 6시 50분쯤이어서
잠깐 일출 사진을 찍고 다시 잠들곤 했다.
작년 1월에 촬영했던 용두암에서 삼양 해변까지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소는 올레길 18코스.
그때도 들었던 무인양품 BGM 3번 앨범의
<Il Carnevale Di Venezia>를 다시 들으며 걸었다.
작년 1월의 삭막한 느낌과 달리
올해 10월에는 억새가 한가득이었다.
며칠 뒤 제주 순환 버스를 타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갈대는 습지에서 자라고 억새는 육지에서 자란다.
따라서 제주에서는 갈대가 아니라 대부분 억새이다.
켈트(Celtic) 민요를 들으며 바닷가를 걷는 것은
작년이나 올해나 여전히 기분 좋았다.
신촌포구 마을에 들어서자 눈에 띄는 식당이 있었다.
부부가 운영하는 수프가게, 비 오는 날의 숲.
오늘 날씨와는 어울리진 않지만 왠지 괜찮아 보였다.
*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10월과 11월의 제주.
실제로 비가 왔던 건 여행의 후반부쯤이었다.
앤틱한 느낌으로 꾸며놓은 실내 인테리어.
녹색 페인트가 너무 새것이라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부모님 세대부터 본인 세대까지의 사진들을
각기 다른 액자로 디피해둔 것이 한 가족의 스토리를
보는 듯해서 내 가족도 아니지만 꽤 흐뭇했다.
"영혼을 따뜻하게 덥혀줄 닭고기 수프"
가격은 12,000원.
수프 안에 에그누들도 있고 빵을 찍어 먹을 수도 있다.
몹시 추운 날 잘 어울릴 듯한 따뜻한 수프였다.
수프와 함께 캐슈넛 무화과 샐러드도 나왔다.
고소한 견과류와 부드러운 무화과가 잘 어울렸다.
디저트로 제주 감귤과 더치커피까지 나왔다.
크게 흘러나오는 보사노바풍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식당 안에는 작은 소품을 파는 공간도 있었는데,
아내분께서 운영하는 느리게 가게의 간이(?) 버전이다.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와 향초를 판매했다.
바닷가 산책이라는 향초를 7,000원에 구입했다.
향초를 감싸고 있는 빛바랜 책 종이가 좋았다.
원래 계획한 시간보다 약간 지체되었지만
아직 2주라는 여유로운 시간이 있다.
서두를 거 없다.
제주, 천천히, 느리게 가게.
버스를 타고 제주 시청 근처까지 갔다.
아침미소목장까지 가는 두 번째 버스가 너무 오래 걸려
택시를 탔다. 거의 다 도착해서 기사님께서 하시는 말.
"오늘은 안 하는 날이네"
화요일은 휴무였다.
나무 사이로 송아지들이 나를 안쓰럽게 보는 듯했다.
목장 안에서 일하시는 외국인 노동자분이
"내일 오세요"라고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상상한 것과는 다르게 황량한 들판과 부서진 난간들.
죄송하지만 내일도 모레도 이번 여행엔 못 올 것 같아요.
버스를 타러 내러 가는 길에
닭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말은 줄에 묶인 채 혼자 물을 마시고 있었다.
공항과 가까운 서쪽의 이호테우 해변과
동쪽의 함덕 해변은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함덕에 갈 때마다 왠지 발길이 가지 않았던 델문도.
카페 리뷰를 보니 오션뷰가 환상이라고 했다.
아메리카노는 6,000원이었고 커피 맛도 괜찮았다.
야외 테라스에서 바라본 전망이 정말 예술이었지만,
가만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너무 강했다.
절반은 실내이고 절반은 야외인 곳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천천히 기다렸다.
태양은 오후 6시 반가량에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 시각을 전후로 하늘의 변화를 지켜보는 게 좋았다.
덕분에 체온이 조금 내려갔어도.
작년 1년간 매달 일요일에 한 번씩 제주에 내려와
제주도 해변을 시계 방향으로 걸으며
<SUNDAYS>라는 연작 사진을 촬영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작업들이 아직 남아있는 채
지난 10월 말, 다시 한 번 제주를 찾았다.
이번에는 2주(실제로는 15박 16일)라는 긴 호흡으로.
다시 제주 한 바퀴를 돌며 2주 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은
작년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곳,
작년 날씨가 아쉬워서 다시 촬영하고 싶은 곳,
해안선 위주의 동선이라 갈 수 없었던 중간 산 지역,
그 사이의 식당과 카페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