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앞 수채화, 명확하게 바라보는 것, 뜻밖에 괜찮은 공간
자보카 게스트하우스에서 모든 짐을 들고 나와서
성산 플레이스 호텔의 폼포코 식당으로 들어갔다.
돈까스 메뉴는 술과 함께 주문 가능하다고 해서
시그니처 메뉴인 규삼겹 모찌동(8,000원)을 시켰다.
모찌동은 덮밥(돈부리)와 떡볶이(모찌)를 합친 것인데,
결과적으로 소고기를 떡볶이 소스에 비벼 먹는
플레이스 호텔 다운 발칙한 상상을 실현한 신메뉴였다.
오묘하게 잘 어울려서 계속 생각나는 맛이었다.
추가로 주문한 유데타마고(삶은 달걀, 1,000원)는
짭짤한 맛은 좋았지만 완숙이라 조금 아쉬웠다.
작년 4월의 하도리 ~ 섭지코지 코스 중
가장 아쉬웠던 곳은 섭지코지의 지니어스 로사이였다.
당시에 공사 중이어서 방문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찾았을 때는 이름부터 유민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조용한 산책로를 걸어 섭지코지의 중심지로 들어왔다.
글라스하우스를 바라보며
수채화를 그리던 여자분도 보였다.
공간은 그대로인데 이름만 바뀐 것이 의아했다.
아무래도 '유민'보다는 '지니어스 로사이'가 더 어울린다.
아무튼 입장료 12,000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을 생각한 안도 다다오 건축은
내가 여기에 왔던 십년 전과 달리 3번의 직장을 바꾸고
심지어 공간의 이름마저 바뀌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미술관 내부는 약간 미로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신발을 바깥에서 벗고 가운데 공간에 진입하면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이어진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아르누보 컬렉션을 다룬 것이었는데,
당시 제작했던 방식을 재현하고
유리처럼 매끈한 작품을 전시해두었다.
제주도와 미술관의 분위기가 그런 것처럼
최대한 여유를 두어 디피한 것이 공간과 잘 어울렸다.
아르누보 시대의 작가들이 영감을 받았던
자연의 영상도 슬라이드 쇼로 재생되었다.
거의 초점이 나간 흐릿한 화면 속에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는 반복적인 영상들이 좋았다.
버스를 타고 남원 쪽으로 향했다.
이번 제주 2주 여행의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는
조용한 남원읍에 있는 루프탑정원 게스트하우스였다.
내가 선택했던 4곳의 게스트하우스 모두
조용한 곳(구좌읍, 남원읍, 안덕면, 한림읍)이었지만,
특히 루프탑정원은 동네에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정도로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첫 번째 날에는 간단한 포틀락 파티를 진행했다.
제주 위트 에일 캔맥주가 맛있었다.
일출 시간에 맞게 일어나서 3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제주 여섯 번째 아침은 근사한 해돋이를 보며 시작했다.
그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은 해가 올라오는
반대 방향에서 한라산의 색의 그라데이션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토스트와 시리얼를 먹고
스텝이 내려진 따뜻한 커피까지 마시고
어젯밤에 이야기를 나눴던 형님과 함께 숙소를 나왔다.
게하에서 각자 제주 여행 계획을 공유하다가
백약이 오름을 함께 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백약이 오름은 버스로는 접근이 쉽지 않은데
거기까지 태워주시고 심심하지 않게 올라가기까지
해주신 기영이 형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10시 반 정도에 백약이 오름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하이라이트 계단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어서
더할 나위 없이 사진 찍기에 좋았지만,
용눈이 오름의 감동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런지
정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큰 감흥이 없었다.
백약이 오름도 용눈이 오름처럼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분화구 주변을 한바퀴 돌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
내려오는 길에는 올라갈 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다음 버스 시간까지 너무 오래 걸려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아부오름까지 걸었다.
차 대신 발로 제주를 여행하다 보면
차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소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부오름에 도착했다.
정상까지 오르는 건 굉장히 쉬웠고
둘레의 길이는 생각보다 길었다.
잘 깨진 달걀 후라이처럼 동그란 둘레길 안에는
소나무들 역시 동그란 형태로 이어져 있었다.
제주 오름 중 난이도 '하'에 속하는 아부 오름.
강아지들도 유유히 내 앞을 산책했다.
다시 30분 정도 걸어서 성산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점심을 먹으러 도착한 곳은 가시아방 국수.
작년 제주 가족 여행에서
고기국수에 돔베고기까지 고기 파티를 하고 나니
엄마가 시킨 비빔국수가 더 맛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비빔국수를 시켰는데 의외로 별로였다.
차라리 고기국수를 시킬 걸 그랬나 보다.
작년 5월의 온평리 ~ 세화2리의 코스 중
다시 한번 오고 싶었던 곳은 신천 목장이었다.
겨울에는 귤껍질을 말리는 진풍경이 있다고 해서
겨울에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던 곳이다.
작년에도 들었던 시티팝을 들으며
올레길 3코스를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맑으면서도 구름이 많은 하늘이었다.
그러나 신천 목장에는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귤피는 없고 검은 천만 돌돌 말려 있었다.
다시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댕댕이가 나를 묘하게 쳐다봤다.
가시아방과 신천목장은 그리 좋은 선택은 못됐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뜻밖에 괜찮은 공간을 발견했다.
여행가게와 연필가게.
여행가게에서는 여행 서적과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티백을
개별 단위로 판매하고 있었다.
여행가게 옆에 연필가게는 작지만 정말 대단했다.
연필 좋아하는 사람이 왔으면 정말 행복할 작은 공간.
세계 각국의 연필들과 귀여운 지우개를 팔고 있었다.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 연필과 티백을 조금 사 왔다.
일찍 숙소로 돌아와서 아직 저녁 빛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날은 주말의 시작이자
기대했던 와이너리 파티를 진행하는 날이었다.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그리고 샹그리아가 나왔고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들이 제공되었다.
파티 참여 비용은 20,000원.
특히 감바스가 맛있었다.
조용한 제주 남원읍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와인을 마시며
그들의 관심거리 혹은 나의 사진과 여행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아주 즐거운 행위였다.
이 날 게스트 중에는 90년대의 유명한 가수도 있었다.
파티가 끝나고 하늘을 봤더니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작년 1년간 매달 일요일에 한 번씩 제주에 내려와
제주도 해변을 시계 방향으로 걸으며
<SUNDAYS>라는 연작 사진을 촬영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작업들이 아직 남아있는 채
지난 10월 말, 다시 한 번 제주를 찾았다.
이번에는 2주(실제로는 15박 16일)라는 긴 호흡으로.
다시 제주 한 바퀴를 돌며 2주 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은
작년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곳,
작년 날씨가 아쉬워서 다시 촬영하고 싶은 곳,
해안선 위주의 동선이라 갈 수 없었던 중간 산 지역,
그 사이의 식당과 카페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