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을 원 없이 받으며, 숲과 와인
일어났을 때는 조금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샤워를 끝내고
아침을 먹은 후에 자연스레 다시 컨디션이 좋아졌다.
사장님을 따라 게하 옆에 있는 감귤 농장에 들어가
소규모 감귤 따기 체험을 했다.
나무에 달린 귤을 가위로 잘라 맛본 귤의 맛은
지금까지의 것과는 다른 신선한 맛이었다.
어제 친해진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간단한 인물 사진도 찍었다.
다섯 명의 인원으로 여행 온 사람들은
택시 한 대를 여행 기간 내내 빌렸다고 했다.
숙소 앞에는 대형 택시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새로운 여행법을 알게 되는 것도
게스트하우스의 재미가 아닐까 싶다.
제주 2주 여행 일곱 번째 날도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201번 버스를 타고 남원읍사무소까지 가서
231번 버스를 타고 붉은 오름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입구에서 삼다수 하나만 구입하고
사려니 숲으로 들어갔다.
사려니 숲은 조금 흐린 날씨에 가려고 했지만
11월초 제주의 날씨는 너무 화창했다.
햇빛이 강해서 삼나무 숲을 마음에 들게 찍을 순 없었다.
그래도 빽빽한 숲 한가운데 서서
시야에 온전히 나무만 가득 들어왔을 때
제주의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사려니 숲에는 곳곳에
미로길, 오솔길이라고 하는 길들도 있었다.
큰 길보다 좁아서 걷기에는 조금 불편하지만
나무를 더 가깝게 볼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사려니 숲 남조로 ~ 비자림로의 코스는
총 10km이며 도보로 보통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숲 산책을 위해 짐도 최대한 줄여서 나왔다.
걷는 듯, 천천히.
평소보다 더 늦게 걸어도 되는 날이었다.
햇빛이 반대로 비치는 숲의 색과
정면으로 비치는 숲의 색 모두 마음에 들었다.
삼나무 숲의 구간이 끝나고 볕이 잘 드는 길이 나왔다.
마치 유럽의 공원을 산책하듯 기분 좋아지는 길이었다.
숲 입구 주변에 많았던 관람객들이
다시 차를 타려고 대부분 입구로 돌아가버려서
중간 지점에 속하는 물찻오름 주변으로는
사람도 거의 없고 맑은 공기와 따뜻한 햇볕만
가득해서 오래 걸었는데도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 하고 소리 지를 만한 일은 없었지만,
다른 친구보다 늦게 철을 맞은 몇 그루의 단풍나무들은
이제서야 아름다운 색을 뽐내고 있었다.
네이버 지도를 보고 숲의 딱 중간에 접어들었을 때
걷기를 잠시 멈추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그리 밝지 않은 2호선 불빛이나
상수나 망원 카페의 텅스텐 광 아래 책을 읽었다.
제주에서 이렇게 태양광을 원 없이 받으며
자연의 여러 색을 배경 삼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 소설을 읽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확행의 그것을 지금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가끔 비행기들이 비행운을 남기며 점점 사라져갔다.
주변 풍경들이 비슷해서 조금 지루해질 때쯤에는
이어폰을 꺼내 하늘만큼 청량한 음악을 들었다.
코스의 끝에 가까워지자
이제 막 숲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보였다.
결국 나는 3시간 코스를 4시간 반까지 늘려
여유롭게 사려니 숲 산책을 끝마쳤다.
작년 일 년 동안 바다를 걷느라 놓친
제주의 숲을 원 없이 즐길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사려니 숲 근처에는 제주마방목지라는 곳이 있어
버스로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햇빛이 길어진 오후에 20~30마리의 많은 말들이
땅만 바라보며 풀을 뜯고 있었다.
버스 시간이 남아서
말들의 생김새와 행동을 천천히 지켜봤다.
내가 서있는 곳까지 풀을 먹으러 다가온
검은 말의 눈이 옆에서도 가깝게 보였다.
초식동물의 눈은 굉장히 깊다고 하던데
실제로 이렇게 가깝게 보니
듣던 대로 슬픔의 감정이 보이는 깊은 눈이었다.
버스가 도착해서 나는 가야 했고
말들은 계속 이곳에 있어야 했다.
5시간에 가까운 걷기는 아무래도 몸에 부담이 됐는지
표선 해변까지 가는 버스에서 계속 졸았다.
표선에 도착하니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그림자는 최대한의 길이로 길어졌고
모래를 밟을 때의 발자국은 깊어졌다.
바다와 바람이 만들어낸 매끄러운 모래의 무늬.
일몰 때의 보라색과 노란색이 본래의 색을 변주하여
아름다운 추상화처럼 느껴지게 했다.
모래사장의 틈 사이로
바닷물이 뱀처럼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쯤 물이 차버린 해변에서 지는 해를 보면서
어느새 제주에서 일주일을,
다시 말해 여행의 절반이 지나갔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시 밤은 찾아왔고
주말의 끝에도 와이너리 파티는 계속됐다.
앞에 앉은 사람은
내가 가끔 듣던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의
앨범에 참여한 인디 가수였다.
서로 인스타 팔로우를 하고 보니
내가 촬영했던 인물 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정말 가깝고 재미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언젠가 앨범 자켓을 촬영해보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바다가 근처에 있어서 아침에 잠깐 바다를 봤다.
여전히 맑고 따뜻한 날씨였다.
제주 여덟 번째 하루가 시작됐다.
작년 6월의 세화2리 ~ 서귀포시 까지의 코스 중
굳이 아쉬웠던 것을 찾자면
카페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냈던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제 파티에 참여한 카페 사장님이 생각나서
원래 가려던 카페 대신 우드노트 카페를 찾았다.
사장님이 말했던 것처럼
조용한 동네에 있는 규모가 큰 카페였다.
묵직하면서도 산뜻한 일렉트로닉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드노트의 유명한 숲 view를 보며
추천해주신 아이스 라떼를 마셨다.
지난 일본 다카마쓰 여행의 6번째 포스팅을 마무리했다.
제주에서 가장 큰 사람인 사장님을 다시 만나
카페 창업과 제주 카페 등 짧고 긴 이야기들을 했다.
사장님과 나는 동갑이라 공감되는 부분이 꽤 많았다.
버스 시간에 맞춰 나와서 서귀포행 버스를 탔다.
목적지 근처 식당 중 리뷰 수가 많은 중국집은 휴무였다.
그래서 급하게 찾은 다른 식당.
제주에 꽃이 피다.
'꽃이 피다'라는 이름과 잘 어울리는 예쁜 공간이었다.
요즘 촬영 때문에 자주 가는 자연광 스튜디오처럼
채광이 좋고 소품들이 잘 꾸며져 있어서
주인분께 물어보니 역시 촬영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내가 주문한 메뉴는
흑돼지 폭립 커틀릿이고 가격은 13,900원이다.
돼지 뼈까지 붙어있는 채로 나오는 게 독특했다.
소스가 달달한 편이라 중간에 핫소스도 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 청귤청을 파는게 보여서
청귤청 에이드(5,500원)도 주문했다.
계산을 끝내고 테라로사로 가려고 했더니
은근히 길이 멀다고 고맙게도 차까지 태워주셨다.
그렇게 도착한 제주 테라로사.
지난달 짧은 강릉 여행에서
카페에 대한 기억이 좋아 제주에서도 찾아갔다.
제주점도 카페보다는 공장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엄청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카를로스 6,000원.
강릉에서 마셨던 시즌 메뉴인 게이샤보다는
특색이 없는 무덤덤한 맛이었다.
2층 높이의 거대한 창으로 저녁해가 다 질 때까지
가운데 긴 테이블에 앉아 일본 다카마쓰의 7번째
글을 쓰며 도쿄 여행 계획을 조금 더 세웠다.
카페 공간은 흠잡을 곳 없이 매력적이었지만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많아서
우드노트만큼의 여유는 찾기 어려웠다.
한라산이 내려다보는 마을을 걸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해는 분명 지고 있었지만 완전에 보이진 않았다.
대신 문 닫힌 상점의 창문에 자그맣게 반사되었다.
서귀포 구터미널에 도착하자 다시 밤이 되었다.
버스 환승 시간이 많이 남아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가까운 용이식당에 들어갔다.
벽에 걸린 설명처럼 고기와 밥을 쌈 싸 먹다가
반 정도 먹고는 밥을 볶아 먹었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3번째 숙소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오름과 스테이크가 있었던 1부가 끝나고
제주 2주 여행의 2부도 끝나 버렸다.
이번에는 숲과 와인의 기억이 남은 채로.
작년 1년간 매달 일요일에 한 번씩 제주에 내려와
제주도 해변을 시계 방향으로 걸으며
<SUNDAYS>라는 연작 사진을 촬영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작업들이 아직 남아있는 채
지난 10월 말, 다시 한 번 제주를 찾았다.
이번에는 2주(실제로는 15박 16일)라는 긴 호흡으로.
다시 제주 한 바퀴를 돌며 2주 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은
작년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곳,
작년 날씨가 아쉬워서 다시 촬영하고 싶은 곳,
해안선 위주의 동선이라 갈 수 없었던 중간 산 지역,
그 사이의 식당과 카페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