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조용했던 길, 파도의 질투, 바위와 장어덮밥
제주 2주 여행의 세번째 게스트하우스는
산방산이 보이는 도체비낭 게스트하우스였다.
서귀포에 홀로 우뚝 서있는 산방산처럼
조용한 게스트하우스였다.
조식으로는 주먹밥과 된장국이 나왔다.
아침이 되어 새하얀 인테리어에 노란 햇살이 비쳐졌다.
바다를 향해 걸었던 길도 유난히 조용했다.
사계 해변에서는 형제섬이 보였다.
분명 작년 여름,
이곳을 지날 때에는 서핑을 하는 무리와
형제섬을 배경으로 하는 패러 세일링이 보였지만,
11월 평범한 화요일에는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분 상쾌한 아침 바다가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용한 형제 해안도로를 걸어 산방산 앞까지 걸었다.
산방산 랜드 앞은 비수기임에도 관람객들로 붐볐다.
오후가 시작되자 더워서 땀이 날 정도의
화창한 날씨가 되었다.
곧바로 용머리 해안을 가보려고 했지만
오전 만조로 1시간 후에 입장할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왼편의 황우치 해안에 가보기로 했다.
산방산의 옆모습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모습이 보였다.
용머리 해안에서 물이 빠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모래 사장이 일부 공사중이라
아래까지 완전히 내려가기가 힘들었다.
시간에 맞춰 다시 용머리 해안으로 돌아왔다.
바로 앞 노점에서 삼다수 하나를 구입하고
용머리 해안의 입장료 2,000원을 내고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오는 길은 지나가던 사람들의 말처럼
그랜드 캐년의 그것을 연상하게 했다.
입구 근처의 작은 동굴은 인기가 많았다.
거대한 지질의 단면을 관찰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가끔씩 뒤쪽의 파도가 바로 발 앞까지 다가와
여기도 봐달라며 질투하는 것 같았다.
화창하면서도 구름이 많이 꼈던 날씨라
암석의 색을 더욱 명확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다.
해산물의 맛이 어떨지 궁금해서
한번 먹어보기로 했다.
만원을 내고 멍게와 소라를 받아 그 자리에 앉아 먹었다.
광어회가 몹시 그리웠다.
사려니 숲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용머리 해안도 40분이면 가는 거리를
1시간 30분을 들여 천천히 촬영하며 걸었다.
제주 산방산에 올때면 용머리 해안도 함께 찾지만
해안 상황에 따라 못보고 갈때가 많았다.
1시간을 기다려 많은 관람객과 함께
정신없이 입장했지만 괜찮았던 선택이었다.
산방산 랜드의 놀이기구는 언제나 생소했다.
숙소에서 산방산까지 걸으며 봤던 식당 중
가장 괜찮아보였던 곳으로 걸었다.
가게의 이름은 사계의 시간.
이름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장어요리를 판매했다.
일드 <고독한 미식가>의 실제 식당을 찾아갔던
지난 도쿄 여행을 통해 알게된 사실.
우나동(うなどん)과 우나쥬(うな重)는 그릇의 차이.
사계의 시간의 장어덮밥은 찬합에 담긴 우나쥬였다.
갈치와 고등어에 친숙한 제주에서
뜻밖의 장어덮밥을 발견해서 반가웠다.
9,000원이라는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도 좋았다.
버스를 타고 안덕계곡 정류장에서 내렸다.
건너편 편의점에서 삼다수 하나를 더 사고
군산오름까지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길가에 감귤 농장이 많았다.
지난주 세미파이널에 진출한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의
음원을 들으며 산길을 계속 걸었다.
멀리 바다를 배경으로 버스가 가는 것도 보였다.
군산 오름의 정상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
드는 생각은 '과연 저기까지 걸어서 갈 수 있을까' 였다.
오름에 오르기가 조금 망설어졌던 이유는
경사가 조금 있고 날씨도 조금 더웠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군산오름은 차로 정상 근처까지
갈 수 있는 오름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듣던대로 운전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은
당황할 수 밖에 없는 좁고 험한 길이었고,
나처럼 정상까지 올라가면서 풍경을 즐기려는
등산객들도 만나 걷기로 한 것이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정상까지는 올라가는 것은
보이는 것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멀리 형제섬이 보였고
그 옆의 실루엣들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지도를 살펴보니 오른쪽 끝이 송악산이었고
그 옆의 길쭉한 것이 가파도였다.
그리고 왼쪽 끝에 마라도까지 희미하게 보였다.
분명 맑은 날씨였지만 한라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많아서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
오후의 일정인 중문쪽도 잘 보이지 않아 실망이었다.
내려갈때는 상예동 쪽으로 걸었다.
작년 7,8월의 정방폭포 ~ 하모해변 코스 중
시간이 부족해서 못 찾았던 군산 오름을
아쉽게나마 이렇게 처음 올라갈 볼 수 있었다.
중문관광단지까지 가는 버스에서 내려
20분 가량을 더 걸어 중문 해변에 도착했다.
중문 해변은 길게 늘어선 해안선으로 치는 파도가
언제나 활기찬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었는데,
초겨울 해변의 색은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여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중문 색달 해변이 아닌 들렁궤였다.
작년 7,8월의 정방폭포 ~ 하모해변 코스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들렁궤를 한번 더 찾기로 했다.
노을이 더 사라지기 전에 우회하여 들렁궤로 향했다.
들렁궤 입구에 다시 도착했을때
노을은 내가 좋아하는 농도로 알맞게 익어 있었다.
사실 들렁궤의 두 입구의 이미지는
작년에 촬영한 것이 이미 완벽하게 처리되어
다시 찍을 필요는 없었다.
다만 내가 표현하려고 했던 주제인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요일이라는 시간이
모양이 비슷한듯 다른
두 입구의 생김새와 맞아 떨어졌고,
이 곳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시리즈의 끝을 조금 더 생각하고 싶었다.
바위 동글이라는 뜻의 들렁궤에 들어갔을때
내가 생각하던 노을이 알맞게 차올라 있었다.
바위에 앉아 그때와 지금의 상황을 생각했다.
무더위에 지쳐 겨우 촬영만 할 수 있었던 그때와
가제본 사진집을 만들어 포트폴리오 리뷰를 받고
다시 고쳐가고 있는 지금을 생각했다.
삼각대 없이 가볍게 온 여행인 만큼
이번에는 아이폰 기본 파노라마 기능을 세로로 기울려
촬영해보기도 했다.
노을이 더 깊어져 걸을 수 없는 밤이 되기 전에
동굴을 빠져나와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오전에 중문 쪽을 간다고 하니 게하 사장님께서
고기국수 맛집 하나를 추천해주셨다.
중문동에 위치한 한라국수.
고기국수는 8,000원이었다.
부산 돼지국밥처럼 진한 국물이 맛있었다.
양파, 고추를 장에 찍어 먹으니 더욱 국밥처럼 느껴졌다.
다음 버스를 여유롭게 기다리며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버스에선 최근 새롭게 시도한 인물 사진 작업을 보고
연락해온 사람들에게 기쁘게 답장을 했다.
조용한 산방산 앞 숙소에 도착해서 영화를 봤다.
여기서 머문 4박 5일간 10편의 영화를 봤다.
작년 1년간 매달 일요일에 한 번씩 제주에 내려와
제주도 해변을 시계 방향으로 걸으며
<SUNDAYS>라는 연작 사진을 촬영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작업들이 아직 남아있는 채
지난 10월 말, 다시 한 번 제주를 찾았다.
이번에는 2주(실제로는 15박 16일)라는 긴 호흡으로.
다시 제주 한 바퀴를 돌며 2주 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은
작년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곳,
작년 날씨가 아쉬워서 다시 촬영하고 싶은 곳,
해안선 위주의 동선이라 갈 수 없었던 중간 산 지역,
그 사이의 식당과 카페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