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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Jun 08. 2023

타문화일기 ② 무지개 프라이드 친구들

2021년 11월 14일, 2023년 4월 27일, 6월 4일 일기 발췌

이번 달은 Pride Month이다. 나는 올해 처음으로 다운타운에서 열리는 LGBTQ2S+ Pride 퍼레이드를 구경 갔다. 평소에는 절대 입지 않을 만한 가죽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아무도 오늘은 나를 성희롱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무도 나를 플러팅 하지 않았다. 올해 가장 눈에 띄었던 이슈는 Trans People's Rights였다. 미국 전역에서 시작된 트랜스피플에 대한 혐오는 내가 속한 대학까지 영향을 미쳤다. 트랜스 피플 혐오를 겨냥한 토크쇼가 열리기도 했고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서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 반대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다. 모두가 말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들에 관하여. 학교 총장은 우리 학교가 모두를 위한 안전한 공간이어야 하며 트랜스 피플 역시 우리 학교의 동등한 구성원이라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있는 뉴욕주는 다른 주에 비해서도 훨씬 진보적임에도 불구하고 LGBTQ2S+ 피플들에게 유독 어려운 상황이 많았다. 내 LGBTQ2S+ 친구들은 그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현했다. 다운타운에서 열린 LGBTQ2S+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오전 11시 조금 넘어서 시작해서 오후 2시 30분이 넘어서 끝났다. 


나는 꽤 진보적인 미국 동부에 유학 와 여러 LGBTQ2S+  피플들을 친구로서 만났다. 우리는 가부장제의 폐해라는 비슷한 관심사가 있었고 곧잘 친해졌고 서로에게 잔뜩 실망했으며, 나는 대체로 아시안 인종차별에 발끈했고, 서로를 가르치려고 들었다. 서로 자신의 경험과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 속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들은 종종 무례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요구했고, 나도 지지 않고 요란하게 나의 권리를 외쳤다. 미국이 모든 면에서 나의 나라보다 대단히 낫다는 건 아니다, 여기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라서 다 문제가 있다. 올해는 특히 미국 대법원이 낙태권을 폐지하는 결정을 하면서 말이 많았다. 그래도 내가 속한 뉴욕주는 타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이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거의 모든 관습과 문화를 포기해야 했다. 


땡땡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묘한 답답함이 있다. 일단 종교적 색채가 짙은 것부터가 그렇다. 종교는 그에게 근원적인 지지 기반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에게 그가 믿는 신이라는 존재는 글쎄요 싶다.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사랑받은 기분을 느껴본 적 없냐고? 없다. 나에겐 내 탄생을 있게 한 그들조차도 조건부 사랑이었다. 내가 이 집의 평화를 지키는 한 유지되는 애정을 받았다. 그마저도 이젠 사라지고 없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우린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지만 우린 다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완전한 사랑 따위는 불가능했다. 증오가 반쯤 섞인 따가운 애정이어서 따끔거리는 가시덤불에 생채기가 생기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누리고 싶은, 차갑게 식기 진적엔 온도였다. 내가 받은 사랑이 어딘가가 결핍된 사랑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맞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다닐 정도로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을 뿐, 나는 애정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하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종류의 언어는 아니다. 내가 용서 못하는 건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다. 만약 옛날의 나를 보게 된다면 나는 신랄하게 역겨워할 자신이 있다. 23년을 거기에 구속되어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스템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삶을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아는 무언의 공통분모가 있다. 쉽게 삭여지지 않는 분노, 넘쳐나는 억하심정, 문뜩 올라오는 울음들은 억압과 트라우마가 남기고 간 흉터이다. 상처의 흔적을 따라가면 피가 고여 있는 깊은 살 웅턱을 발견하게 된다. 살이 파이다 못해 뼈까지 드러나기까지 얼마나 이 자리에서 꼿꼿이 몸을 세우고 견뎌왔는지 나는 모른다. 나의 기적은, 나의 치유력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내가 맛본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고독함을 잊을 수가 없다. 황야에 홀로 남겨진 부랑아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뿐, 어디도 적응할 수 없었다. 이제 와 모두를 용서하라느니, 사랑이라느니 그런 쉬운 말들에 반항심이 든다. 그 시간을 홀로 감내한 건 나 자신이 또 다른 누군가는 아니었다.


운 좋게 LGBTQ2S+ 공동체에서 주최하는 독서 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환영했고 나의 고통일대기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끌어냈다. 나는 내가 느낀 고통을 토로했고 우리는 같이 울었고 서로 돈독해졌다. 나에게 내 고통을 최초로 고백하게 한 완벽하게 안전한 공간이었다. 우린 서로를 안아줬다. 연민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불편해졌다. 사회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불평등이란 애석하게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자신의 경험을 언어를 통해 어렴풋이 뭉뜬 그려 말하는 일도 고통스럽고 그걸 가만히 앉아 듣는 일도 그 자체로 고통을 유발한다. 그 모임이 나에겐 고통을 얼룩졌다. 나는 더 많은 고통을 말할 수도 없었고 들어줄 수도 없었다.


이미 나는 내 문제만으로도 너무 지쳐 있었다. 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그런 일이다. 정말 솔직해져야 한다. 마음을 티끌 없이 닦은 다음에 무릎 끓고 앉아서 나의 잘못을 절실하게 고백하는 행위이다.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나의 존재와 가족의 비밀을 간직하는 데 사용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 일이 나만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고 계속 되뇌었다. 이제 나에겐 결정이 남았다. 나는 소란스러운 새벽을 맞이한 그날 아침에도 학교에 갔다.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고 또 어느 날 나는 죽었다. 나는 도망갔다, 학교로. 나는 엄마도 구하고 아빠도 구하고 싶었다. 다시는 못 볼 그들이여, 안녕. 나는 낯선 곳에 와서야 나를 만났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덤덤히 자라온 그는 자신의 인생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남을 도와주고 싶어 했다. 나도 그랬다. 나는 또 사람들을 마주 앉고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덤덤하게 그들을 연민했다. 나는 또 듣는다, 그들을 위해서. 


I accept that I have a role to play in resisting discrimination against trans people because all inequality and injustice are unacceptable.


대체 텍스트: 오색으로 손바닥 프린트 되어 있는 거대한 그림이 검은색 트레이드에 걸려 있다. 그림 가운데엔 거대한 황소가 하트 무늬를 가슴에 새긴 쳐 그려져 있다.

상황 설명 : 날씨가 좋았다. 퍼레이드 구경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우리는 서로를 아는 사이였다. 우린 그들의 작은 용기에도 크게 반응했다. 환호해 줬다. 끝까지 지켜봤다. 햇빛이 뜨겁게 느껴졌지만, 경찰차와 응급차가 마지막 순서로 나오고서야 자리를 떴다. 나는 학교로 돌아와 Trans People에 관한 책 한 권을 완독 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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