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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Nov 18. 2018

길을 잘 찾는 서울 사람들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강변북로를 달리다가 한남동으로 진입하는 대신 한남대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우리의 구형 SM5는 시속 구십 킬로미터의 속도로 남으로, 남으로 달리게 되었는데 (우리의 미래인) 반대편 차선 위의 차들은 외계인 침공을 피해 뉴저지로 대피하는 이들처럼 옴짝달싹 못한 채 다리 위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다. 내비게이션은 도착까지 남은 시간을 사 분에서 사십 분으로 조정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으로, 사실상 내비게이션이 미안한 마음에, 그러니까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참아, 십 분이면 돼, 이번엔 진짜야…… 하고 일단 안심시켜보겠다는 듯한 느낌이었으며…… 재난 상황이나 다름없는 한남대교를 보고 있으면 우리 차가 압구정동에서 유턴을 한 뒤 다시 다리를 건너와 사십 분 후에 최종 목적지인 순천향대학교 병원에 도착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내가 사십 분이 아니라 더 이상은 사 초도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메마르고 거친 공기 속에서, 헛기침까지 참아내며 굳건한 침묵을 유지한 채로 반시간을 넘게 달려왔고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수진은 집에서 나와 운전대를 잡자마자 브레이크등이 들어오지 않는 차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평소 나는 그런 차들이 있다는 걸 의식해본 적도 없는데) 이 나라 자동차 정기검사 체계에 저주를 퍼부어댔고, 나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급정거를 할 때마다 조수석에 앉아 그녀에게 시위라도 하듯 들숨이 다할 때까지 길고긴 한숨을 내뱉었다. 얼마 후에는 화원에 들러 동생에게 가져갈 화분을 차에 실었는데 그 또한 재앙이었던 것이, 뒷자리 바닥에 앉힌 그것은 어떻게 자리를 잡아도 안정적이지가 않아서 차가 움직일 때마다 끄떡끄떡 거리며 좌석이며 문손잡이에 끊임없이 부딪혀서 시간이 갈수록 짜증이 치솟게 했다. 거기다 냉매가 다 새나가버린 에어컨에서는 미적지근한 바람만 흘러나오는 와중에 늦봄이지만 꽤나 강렬한 햇살은 선팅을 옅게 한 유리를 무참히 뚫고 들어와 차 안을 찜통처럼 만들었고 이너를 입지 않은 셔츠 안쪽에선 등줄기를 따라 땀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하는데, 한마디로(이미 한마디도 아니지만) 엉망진창이었다. 정말이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사십 분이라니? 나는 그 자리에서 딱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깊은 슬픔과 회한이 인간의 정신을 과거로 회귀하게 하는 것처럼 어떤 분노는 그 근원을 탐색하게 한다. 나는 집요하게 이 모든 일의 원인을 되짚어보았다. 아침부터 어쩐지 저기압인 수진이 문제일 수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먼저 퉁명스러운 투로 말하기 시작한 건 나였다. 하지만 나라고 대단하게 짜증을 부린 건 아니고 평소처럼(평소 언제?) 웃는 낯으로 밝게 말을 건네지 않은 것이 다였을 뿐 말다툼다운 말다툼이나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이불에서 나온 뒤 냉동실에서 꺼낸 음식들로 대충 아침을 때우고 한방에서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서로의 앞에서 저 옷을 입었다 이 옷을 벗었다 나갈 채비를 했고 그러는 도중에 특별히 대화는 나누지 않았고…… 그게 다였다. 그렇다면 칼라데아 화분이 문제였을까? 오늘은 최근 발병한 파킨슨병으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내 동생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날이었고 우리는 문안 선물에 대해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 백화점 한 층을 가득 채울 만큼의 다양한 품목이 우리 사이를 오갔지만 이렇다 할 확신 없이 화분으로 결정되었고(말 그대로 결정이 되어‘버렸’고) 칼라데아를 고른 것은 나였는데(단지 내가 그 식물을 평소에 길러보고 싶어했다는 이유로) 수진이 그것은 병실에서 키우기에 적당한 식물은 아닌 것 같다고 하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내가 산 칼라데아 오르비폴리아는 이파리가 넓고 둥근 관엽식물로, 급수나 채광에 지나치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으면서 오묘한 빛깔과 은은한 광채를 지닌 아름다운 종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뒷좌석에 음험하게 몸을 숨기고 내게 죽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되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내게 굳이 ‘수진과 함께’ 이 동쪽 끝(서울 서부에 살며 강변북로를 이용하는 이들에게 한남대교란 그저 동쪽이라는 ‘방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으로 가라고 한 어머니? 하지만 수진은 그 말이 없었어도 스스로 동생을 찾아갔을 테니까. 그렇다면 끝내 동생을 이해하지 못해서 발병 전까지 그 아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했던 아버지? (그리고 뒤늦게 병실을 차지하고 앉아 매순간 눈물만 흘리고 있다는 그 아버지……) 그것도 아니라면 에어컨 냉매를 보충하려고 찾아간 자동차 공업사의 불친절한 점원이라든가. 결국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컴플레인을 걸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해 느닷없는 더위에 나를 무방비 상태로 밖으로 내몬 그 무례한 인간?


나는 이제 남단에 도달해 속도를 줄이고 있는 차 안에 앉아 건너편 차선으로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는 차들을 바라보며 저들은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지 않고 올바른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길을 잘 찾는 걸까? 한남동에 가려는 사람들은 한남동으로, 압구정동에 가려는 사람들은 압구정동으로. 남으로. 북으로. 서쪽 끝으로. 동쪽 끝으로. 어떻게 화분을 실을 때 그것이 뒷좌석을 건들지 않도록, 의자나 문에 자꾸 부딪히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사람들은 정말로 목적지로 향하고 있기나 한 걸까? 어쩌면 사실은 우리처럼 길을 잘못 들어서 엉뚱한 방향에서 시간과 자기 자신을 죽이면서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아니면 삭이지도 못하고) 앉아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뒷좌석에서 신경을 거스르는 화분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지는 않을까? 밖으로 던진 칼라데아의 적갈색 토분이 폭발을 일으켜 한강 다리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있는 모든 차들을 강물에 처박아 이 지옥도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은 기분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우리의 브레이크등은 잘 들어오고 있을까? 누군가 뒤에서 우리가 급정거를 할 때마다 씨발, 브레이크등 좀 고쳐라 이 개새끼야, 하면서 욕설을 뱉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분노를 삭이고 (아니면 삭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폭발시키지도 못한 채, 뭐랄까, 자동차 엔진처럼 내부에서 흡입-압축-팽창-배기를 반복하면서 그냥 어찌 할 도리 없이) 앉아 있는 건 아닐까? 그 와중에 내 동생은 사실 칼라데아 화분 따위에 아무 관심도 없(을 테)고,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붕괴되지 않은(/는) 이 세계에서 무기력을 삼키고 (아니면 삼키지도 못하고) (목구멍을 긁어내고 싶을 정도로 메마르고 따가운 침묵 속에서 그저 무기력하게) 우리가 다리를 건너오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영영 남쪽이나 동쪽 끝으로 정체되어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사실 나는 아무것에도 분노하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슬퍼하지 않고 있는 것 아닐까? 나는 피가 날 때까지 목구멍을 긁어내고 싶었고 우리는 이제 막 다시 북단으로 향하는 한남대교로 진입했으며 수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난반사하는 햇빛 때문에 부옇고 아득하게 보이는 한남동 방향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정영수

1983년 서울 출생. 2014년 『창작과비평』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애호가들』이 있다. 인생 열심히 살고 싶은데 자꾸 잠이 온다 잠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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