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endental과 Transcendent의 차이
월간지 <번역하다> 2023년 1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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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철학번역은 메이지 시대 일본 번역가의 작업에 뿌리를 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할 수 없었다. 나라를 개방해서 격동기를 맞이했지만, 지식 수입에 필요한 언어가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라를 빼앗긴 탓에 우리가 우리말을 주도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일본어를 거쳐서 지식을 수입해야 했다. 거의 동일한 한자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본어는 우리말을 빠르게 점령했다. 같은 이유로 우리가 일본인이 만든 신조어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버린 상황에서 오늘날의 철학 용어를 단지 일본인이 만든 한자어라는 이유만으로 추방하거나 탄핵할 수 없다.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세월을 먹어가며 우리의 일상 언어로 편입된 단어들이 많기 때문이다. 철학, 과학, 이성, 자유, 객관, 주관 같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한국어’가 일본 번역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 단어는 이미 우리말이 됐으므로 계속 사용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토록 긴 세월을 줬건만 여전히 우리 일상 언어로 편입되지 않은 단어들이 있다. 일본 번역가의 수완이 항상 탁월한 것은 아니었다. 한 세기 넘게 은폐된 치명적인 오류의 번역어도 있다. 비록 국어사전에 씌어 있어도 극소수 사람들의 지식 독점에만 기여할 뿐 지식의 공유와 전파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이런 단어들을 우리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 나는 이번 연재를 통해 그런 단어가 한국인의 지식 세계 안에서 배회하면서 어떻게 지식을 저해하는지 살펴 보고, 그 대안을 찾는다.
지난 두 차례의 연재를 통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영어번역본에 수록된 단어 중에서 ‘perception’, ‘apperception’, ‘synthesis’, ‘a priori’라는 단어를 분석하고 검증했다. 각각 ‘지각’, ‘통각’, ‘종합’, ‘선험’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번역어의 의미적 위상과 원래의 메시지를 분석한 결과, ‘감지’, ‘자각’, ‘연결’, ‘선천’으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함을 밝혔다. 오늘은 ‘transcendental’과 ‘transcendent’를 살펴본다. 마찬가지로 단어마다 갖는 위상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한다. 그 위상은 의미 모호성(명백하거나 의심스럽거나), 난이도(쉽거나 어렵거나), 정합도(의미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오해 가능성(의사소통에 이익이 되거나 장애가 되거나)이었다. 각 단어의 위상값(Wp)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값은 0~4 범위의 정수로 나타냈다. 행렬의 성분 값은 낮을수록 좋다. 숫자가 커질수록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가 모호하다는 것이고, 어렵다는 것이며, 잘못된 번역일 수 있다는 것이고, 소통에 불리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느 항목이든 3~4에 해당하는 점수가 하나라도 있으면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경우 대안을 탐색해야 한다.
transcendental
2018년의 일이었다. 칸트철학의 몇몇 용어를 둘러싸고 백종현 교수 쪽과 한국칸트학회 쪽으로 나뉘어서 한겨레신문에서 지면 논쟁을 벌였다. 칸트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면서 대단히 이슈가 되기는 했는데, 그 실질은 아카넷 출판사의 칸트 번역본과 한길 출판사의 칸트 번역본, 다시 말하면 백종현 교수의 번역본과 한국칸트학회의 집단 번역본 사이의 출판시장 논쟁에 불과했다.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었다. 한국칸트학회는 고 최재희 교수의 번역을 계승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약 650회 정도 나타난다. 칸트는 ‘transcendental’이라는 단어의 뜻을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한다.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독일어든 영어든 한국어이든 그냥 ‘초월적’이라는 뜻이고, 여기에 어떤 잘못이 없다. 그런데 ‘초월적’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생기는 어떤 신비적 어감과 칸트가 ‘transcendental’이라는 단어로 전하려는 메시지 사이에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초월적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는 금방이라도 어떤 한계를 뛰어넘는 신 같은 존재를 떠올린다. 서양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칸트는 그런 의미의 단어로는 ‘transcendental’이 아닌 ‘transcendent’라는 단어를 쓴다. 하지만 칸트가 완벽하게 구별해서는 쓰는 것은 아니어서 가끔 ‘transcendent’이라는 단어를 쓸 대목에서 ‘transcendent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칸트 스스로 ‘transcendental’과’ ‘transcendent’의 분명히 구별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두 단어의 공통점 또한 칸트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 번역어를 분석하기 전에 칸트의 메시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은 대상에 대한 지식을 그 대상과 관계 맺는 행위, 즉 ‘경험’을 통해 획득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지식이 같지 않다. 경험이 차이를 만든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경험이라는 장벽이 있다. 우리는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므로, 경험이 한계 짓는 그 경계는 필연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당신과 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인간을 인류로서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칸트가 그것을 탐구한다. <순수이성비판>은 지식을 얻으려는 ‘인류 공통의’ 머릿속 알고리즘에 대한 보고서이다. 칸트는 생각한다. 그런 경험의 장벽과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을까? 만약 경험을 초월할 수 있다면, 당신과 나는 다같이 ‘인류’로서 차이가 없어진다. 그때의 초월이 바로 ‘transcendental’이다. 경험의 한계를 초월했으므로, 결국 ‘인류 공통의’라는 뜻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칸트에게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대상을 인식할 때, 다시 말하면 대상을 경험할 때, ‘그때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탐구하는 작업이 <순수이성비판>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그때의 인간은 개별 인간이 아니다. 인류 전체에,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즉, ‘초월적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경험이 다르지만, 그런 경험의 한계를 초월해서 모든 인류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그런 것을 일컬어, 칸트는 ‘transcendental’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런 ‘transcendental’은 대상과 그 대상을 마주한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정확히 말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이점을 없애주는 조건에 대한 것이었다. 한편 인간은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을, 경험할 수 없음에도, 잘만 생각해 낸다. 그런 대상의 성격을 일컬어 칸트는 ‘transcendent’라 칭했다. 칸트는 인간의 지식은 경험을 통해 획득된다고 전제한다. 경험은 대상의 실체를 직접 얻는 게 아니다. 인간의 머릿속 이미지로 그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경험으로 직접 닿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의 ‘참된 의미’를 인간의 머릿속으로 가져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알 수 없다. 생각할 수는 있어도 진리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대상 그 자체는 경험의 한계 바깥에 있다. 인간은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신, 영원불멸의 삶, 세상의 시작과 끝 같은 것은 인간이 결코 경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관해서도 무엇이 참이요 무엇이 거짓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생각하면 오류에 빠진다. 그런 것들이 바로 ‘transcendent’이다.
이처럼 ‘transcendental’과 ‘transcendent’
둘 다 ‘경험의 한계를 초월한’이라는 뜻을 갖는다.
인식 주체에 관해서
경험의 한계를 초월함으로써 인류 공통에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로는 ‘transcendental’이다.
인식 대상에 관해서
경험의 한계를 초월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로는 ‘transcendent’이다. 이제 차례대로 단어의 위상값을 분석해 보자.
최재희는 ‘선험적’으로 번역한다. 일본인의 번역을 수입한 것이다. ‘선험’이라는 단어는 앞설 ‘선先’이라는 한자와 경험의 ‘험驗’을 조합해서 만든 일본식 번역어로 일상 생활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데다가(3점) 중고등학생 수준의 어휘력으로 쉽게 이해할 만한 단어가 아니다(3점). 이런 점에서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초월’이라는 단어에 비할 바가 못된다. 게다가 칸트는 ‘경험에 앞선’이라는 의미로는 일관되게 ‘a priori’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번역가가 저자의 일관성을 무시하고 ‘transcendental’의 번역어를 들이민 것이다(3점). 이런 번역가의 행동 때문에 의사소통의 혼란이 당연히 발생한다(3점). 그러므로 ‘transcendental’에 대한 번역어 ‘선험적’이라는 단어의 위상값은 다음과 같다.
이런 위상값은 ‘선험적’이라는 단어가 ‘transcendental’의 번역어로 적합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번역을 통해 칸트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칸트의 메시지를 사전에 이해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번역어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이상한 번역이다. 번역자가 주석으로 의미를 보충하면 충분한 상황에서도 저자의 영역까지 함부로 침범한 월권의 번역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초월적’이라는 단어를 분석하자.
‘초월적’이라는 단어는 중고등학생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다(1점). 무엇인가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의미가 명확히 전해진다(1점). ‘transcendental’은 칸트 이전이든 이후이든, 칸트철학이든 아니면 다른 사상에서든 ‘초월적’이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언어 표현에 민감했던 칸트 자신이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1점). 다만, 칸트가 말하려는 ‘인류 공통의’라는 의미는 ‘초월적’이라는 단에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오해 가능성’에서는 3점을 부여한다.
단어 위상값에서 3점이 들어갔다. 그러나 큰 잘못은 아니다. 원문에서도 그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주석을 달아 독자를 안내할 수 있다. 따라서 ‘초월적’은 ‘transcendental’에 대한 번역어로서 ‘선험적’에 비해 훨씬 좋은 번역이다. 아니, 비교조차 안 된다. 이러함에도 한국칸트학회가 ‘초월적’이라는 단어 선택을 이유로 백종현 번역을 핍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백종현 번역의 문제점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그렇다고 한국칸트학회의 번역이 백종현 번역보다 좋은 것도 아니다).
한편 일군의 번역가가 ‘초월론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론論’이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일본식 번역이며, 실제로 일본에서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의미를 간명하고 자명하게 전하는 것이 언어의 역할이다. ‘론’이니 ‘학’이니 하면서 필요 이상 의미를 과장하는 나쁜 습관이 일본 문화에서는 어떻게 통할지는 몰라도 지식의 쉽고 빠른 공유를 원하는 오늘날 한국 문화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론’이라는 한자어를 붙이면 뭔가 개선되는 게 있을까? ‘초월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고 난해해질 뿐이다. 칸트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하려는 역할도 못한다. ‘론’을 하나 추가했을 뿐이어도 단어의 위상 값은 이렇게나 나빠진다. 괜히 ‘초월적’과 ‘선험적’의 번역 논쟁을 해결하기보다는 뭉뚱그려서 넘어가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따라서 ‘transcendent’의 번역어로 ‘초월론적’은 경청하고 채택할 만한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그냥 ‘초월적’으로 번역하면 된다. 번역가가 주석을 단다면 ‘인류 공통의’라는 뜻으로 안내할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두 개의 편으로 나뉜다. 제1편은 ‘초월적 요소론’이고, 제2편은 ‘초월적 방법론’이다. 번역가의 주석이 있다면, 독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제1편은 ‘인류 공통의 요소론’이다. 우리 인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요소에 대해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2편은 ‘인류 공통의 방법론’이라는 의미이다. ‘초월적 자아’는 어떻게 이해할까? ‘인류 공통의 자아’라는 뜻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초월적 자아를 갖는다. 이것은 당신과 나를 구별하는 자아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그런 구별의 한계와 장벽을 ‘초월해서’ 누구나 갖게 되는 공통된 자아를 뜻한다. 칸트는 그것을 ‘인격’이라고 했다. 당신과 내가 차이가 없는 존재로서 모두 인류가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을 갖게 되는, 그것이 바로 ‘초월적 자아’의 참된 의미이다.
최재희와 백종현 모두 ‘초험적’으로 번역한다. 역시 한자어를 조립해서 만든 일본식 번역이다. 잘못된 번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1점), 우리 국어사전에는 없는 단어이고, 한국인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 의미가 모호하고(3점), 사전 지식이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대졸자도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4점). 그러므로 ‘transcendent’에 대한 번역어 ‘초험적’이라는 단어의 위상값은 다음과 같다.
‘초경험적’이라고 번역하면 간명하고 자명한 일이다. 한국에서 철학이 난잡한 까닭은 일본식 번역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그야말로 역동적이다. 여기저기서 경계를 뛰어넘는 생각과 행동이 넘쳐난다. 한국사회는 이미 일본식 정신 — 옛 장인이 정한 규칙을 따르는 정신 —에서 벗어났다. 철학만 일본의 족쇄에 묶여 있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초월적’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선험적’, ‘초월론적’이라는 단어를 고집하고, ‘초경험적’이라고 하면 그만일 번역을 ‘초험적’이라고 생색내는 것이다.
책을 출간했어요.
책에서는 사례가 훨씬 풍부하고
좀더 정확한 분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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