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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Feb 20. 2023

칸트의 '이념'이란 무엇인가?

이데아 개념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마지막)

이데아란 무엇인가, 세 번째 글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살펴봤고

https://brunch.co.kr/@jwsvddk/260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의 질료형상론도 알아봤습니다. 이것은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제자의 반론이었습니다. 

https://brunch.co.kr/@jwsvddk/261


이제 칸트의 이데아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념'으로 번역했습니다.

실은 '이데아'와 같은 말입니다.


먼저 유튜브 영상 소개합니다.

최근들어 가장 정성껏 만든 것 같아요.

https://youtu.be/lKaWIGUgGGs


이 영상 보시면(설거지하시면서, 혹은 운전하시면서, 또는 산책하시면서 들으시면 아주 좋습니다. 20분을 좀 넘는 영상이어서요....) 철학의 나침반 하나 얻는 기분이 드실 겁니다.


영상보다는 글이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영상 중에서 칸트철학에 관련해서, 

글로 요약해 봤습니다.


어려운 철학용어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인간은 세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지식을 얻는 능력입니다. 

뭐, 대단한 발견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입니다. 


먼저, 감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뭔가를 수용합니다. <수용력>이라고 말하면 좋겠지요. 우리들 바깥에 있는 자료들을 감각을 통해 수용해서 머릿속으로 가져옵니다. 그것을 철학자들은 ‘경험’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음으로 지능이 있지요.


 <사고력>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습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한 다양한 자료들을 잘 연결하고 합치고 분류해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동물도 감각기관과 뇌가 있으니까 수용력도 있고 사고력도 있습니다. 뇌의 크기가 다르다 보니 인간의 사고력이 동물의 사고력보다는 훨씬 뛰어날 겁니다. 컴퓨터, 인공지능도 수용력과 사고력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다양한 센서와 입력기관을 통해 데이터를 수용한 다음, 프로세서와 알고리즘으로 그 데이터를 합치고 연결하고 분류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으니까는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수용력과 사고력이 뭐 대단한 것 같지는 않군요.


마지막 세 번째 능력은 무엇일까요? 인공지능이 흉내 내지 못하는 게 있고, 동물의 경우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인간의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능력>입니다. 이 세계와 우주의 기원까지 알고 싶고, 알려고 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한편으로는 인류가 종교에 미치고 환장하는 까닭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더 좋은 사회진보를 생각하는 까닭도, 이런 <영적인 능력>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얘기 하나도 없지요?

대략 수긍할 수 있는 얘기잖습니까? 


감각기관의 <수용력>, 

머리의 <사고력>, 

머릿속 어딘가에 있는 <영적인 능력>, 

이 세 가지 능력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공통된 특징도 있습니다. 그걸 탐구한 것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입니다. 


먼저 감각기관의 <수용력>이, 오감을 통해 나 바깥에 있는 자료를 머릿속으로 가져오는데 어떻게 가져오는 것일까요? '시간'과 '공간'으로, 시공간 좌표계 같은 곳으로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각자료에 시간이 부여되기 때문에 앞뒤 순서를 구별하게 되고, 감각자료에 공간이 부여되기 때문에 사물을 비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칸트의 시공간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개념만큼이나 유명합니다. 


여기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칸트를 읽다가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 우리들 바깥에, 즉 자연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머릿속에 있는 개념이라고 칸트가 주장했다? 고 오해하시더라고요. 칸트는 절대, 단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당연히 자연계에 존재하지요. 그걸 어떻게 부정하겠어요? 자연계에 시간과 공간이 있겠지만, 우리들 머릿속에도 시간과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뭔가를 머릿속으로 가져올 때, 즉 감각기관이 감각자료를 수용할 때,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안으로 가져온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최초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겁니다. 이해하시겠지요? 헷갈리지 않으셨지요?


다음은 두뇌의 <사고력>입니다. 

인간의 사고력은 시간 속성과 공간 속성이 부여된 감각자료를 질서있게 배열하고 연결하고 분류하면서 감각자료를 이해하고, 판단하여 지식을 만들어 냅니다. 사고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두뇌는 지식 공장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식 공장의 공장장이고요. 이때 드디어 인간의 자아가 지식의 주인공으로 자기 능력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아의 생각하는 능력이라는 것은 결국 감각기관을 통해 가져온 정보를 질서있게 잘 분류해서 개념을 부여해서 지식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인간 지능의 다양한 분류법을 일컬어 칸트는 <범주>라 불렀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12가지 범주를 제시합니다.


사고력은 수용력이 없으면 꽝입니다. 감각기관이 없다면 인간은 생각을 자료를 얻지 못하고 그러므로 바보가 됩니다. 이 말은 또 이런 의미입니다. 인간 바깥에 있는 대상은 감각기관에 의해 수용될 때 감각기관에 의해 즉시 오염되기 때문에 대상은 순수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 그 자체의 모습으로 인간의 머릿속으로 들어지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지능은 감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는 있어도 사물 그 자체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갖습니다.


인간의 세 번째 능력인 

<영적인 능력>이 문제입니다. 


이 능력이 겸손하게 작동하면 <수용력>과 <사고력>을 거친 지식을 더 깊게, 더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사고력>이 열심히 일해서 만든 여러 지식을 연결하고, 원리와 법칙을 발견해서 인간을 고양시켜 줍니다. 이때의 <영적인 능력>은 경험을 전제로 자기 일을 합니다. 경험이 없다면? 사고력도 빈곤해지고, 사고력이 빈곤해졌으니까 <영적인 능력>은 무능해집니다. 원리든 법칙이든 꽝이 되지요.


그런데 이 <영적인 능력>은, 인간의 보통의 지능(사고력)과 다르게, 감각기관이 뭔가를 수용하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경험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 혼자서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동물과 다르게, 인공지능과는 다르게, 반드시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경험하지도 않은 것을 아는 척하기 때문에 오류에 빠집니다. 도대체 영적인 능력은 무엇을 혼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은, 종교가 무엇이든, 신념이 무엇이고, 어떤 사고력을 가졌든, 

신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 세계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내세의 삶은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경험과 무관하게(즉, 순수하게) 누구나 갖는 생각입니다. 이런 경험을 초월해 버린 생각을 일컬어 칸트는 뭐라고 했을까요? 


‘이데아’입니다. 


네. 플라톤의 그 ‘이데아’입니다. 칸트가 어떤 용어를 쓸까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조금 떨떠름한 기분을 표현하면서 가져온 단어가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였습니다. 실제로 순수이성비판에 그런 기분을 표현하면서도 다른 단어를 쓰지 말라고 주의를 줍니다. 혼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옛사람들(일본 사람들)이 칸트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념’으로 번역했습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요. 그러니까 칸트가 우려한 대로, 좌우이념, 건국이념 같은 이념과 칸트의 이념이 섞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약합니다. 인간은 수용력, 사고력, 영적인 능력, 이렇게 세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이걸 칸트의 언어, 아니 칸트의 독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표현하면, 


감성, 지성(광의의 이성), 이성(협의의 이성)입니다. 


감성은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갖고, 

지성은 범주라는 개념(형식)을 가지며, 

이성은 이데아라는 형식을 갖습니다. 


감성-지성-이성이 사이좋게 연결되어 있으면 인간은 좋은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혼자서 제멋대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때 이성의 순수 형식을 일컬어 칸트는 이데아라고 칭했던 겁니다. 사람들이 이데아 취해 제멋대로 상상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데아를 지식으로 내세우면, 즉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우주의 시초를 확언하거나, 내세의 삶을 주장하면 그 즉시 오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 오류는, 아,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수양이 필요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성을 수양하면 좋을까요? 그것에 대한 칸트의 답이 순수이성비판 마지막 파트인 <초월적 방법론>입니다.


이해하셨나요?

임마누엘 칸트 할아버지의 이데아론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데아란 무엇인가에 대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이 세 분의 할아버지들의 생각을 살펴봤습니다. 저마다 이데아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각자 생각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물질적이지 않은 완벽한 무엇이었으며, 존재의 원형이었고, 보이지는 않지만 머릿속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개념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진리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는 리얼리티 안에 이미 구현되어 있는 형식이었습니다. 만물은 재료(내용)과 형식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였습니다.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이때의 형식(형상)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플라톤처럼 머릿속에서, 인간의 사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질료형상론이었습니다. 칸트의 이데아는 인간의 이성이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 제멋대로 생각해 내는 신, 우주, 영생이라는 3가지 관념이며, 알 수도 없으면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할 때마다 생기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오류였습니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플라톤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이든 칸트이든, 누구의 주장에서도, 이데아는 우리들 머릿속 사유물입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형식(For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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