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말할 것입니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아니, 단 일 분이라도, 하인으로 살지 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발람의 카스트는 할와이, 과자를 만드는 자. 피에 새겨진 숙명대로 사는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대물림해온 가난과 무지는 카스트보다 힘이 세다. 발람도 발람의 아버지도 발람의 형제들도 과자를 만들지 않지만 그들의 삶은 안락과 인정과는 떨어져 있다. 가난한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학교에 못 가고 하인 자리로 내몰리며 그나마 받은 월급은 모조리 가족의 부양을 위해 써야 한다. 발람의 할머니는 인정이 없거나 손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가혹해진다. 지참금을 가져와 잠시나마 궁핍한 생활에 숨통이 트이도록 얼굴도 못 본 여자와 때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삶은 나아지지 않고 의무와 거짓 사랑은 끈적한 그림자처럼 어디든 달라붙는다. 그때 인간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아 눈을 감거나 그림자를 벗고 빛 속의 괴물이 되거나. 그렇다. 얼룩무늬와 황색 털은 눈도 뜨지 못할 빛에 담그면 빠져나가 버린다. 주인들에게 바치기 위해 줄을 서서 샀던 영국 술병으로 야쇽 선생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순간, 조카의 손을 잡고 훔친 돈이 든 가방을 들고 기차역에 서는 순간, 아주 오래전 스스로 칭했던 화이트 타이거가 된다.
그가 주인을 죽이고 주인의 돈을 갖고 주인의 이름을 대며 주인의 방식대로 방갈로르의 기업가가 되는 일이 과연 그의 말대로 승리하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발람도 알고 있다. 어느 날 이 모든 것은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하인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주인의 발을 주무르고 할머니에게 월급을 부치지 못한다. 어떤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다고 깨닫는 순간, 그가 선택한 것은 잔혹한 파멸이다. 그의 회사 운전수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아이를 차 사고로 죽이자 그는 뇌물로 사태를 마무리한다. 비탄에 젖은 어머니에게 배상금을 내밀면서. 그가 일등 하인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숭배하던 주인의 민낯을 보게 된 계기가 바로 그것이면서. 술에 취한 주인이 몰던 차에 사람이 죽자 가족에게 보상할 테니 감옥에 대신 들어가라고 당연하게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이었을까, 아이의 어머니에게 봉투를 내밀 때의 표정은.
먹거나 먹히거나.
세상의 허울을 두를 수 있는 삶이란 사치스럽다. 세상이 저 단순한 약육강식의 선으로 깔끔하게 나뉜다는 것을 본 사람에게는.
그래서 나는 발람을 옹호할 수도, 그렇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는 더 이상 하인으로 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과 결과가 그가 살아왔던 세상의 방식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그림자를 떼어내고 기꺼이 빛 속의 괴물이 되기를 선택했다. 언젠가 칼날이 턱 끝에 닿고 세상이 뒤집혀 그의 죄악이 목덜미를 물어뜯는다고 해도.
그는 화이트 타이거일 것이다. 탕탕 발을 구르며.
그가 죽인 주인의 거죽으로 크게 웃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