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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Apr 15. 2024

술을 못 마셔요

아이스크림은 먹어요


  서양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저녁에 놀거리가 없다. 한국에 있을 때는 퇴근 후에도 할 거리가 넘쳐났다. 카페에 가서 친구를 만나거나 공원에서 산책을 하기도 하고, 11시까지 영업하는 동네 서점이나 코인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대부분의 카페들은 6시면 문을 닫고, 바와 클럽이 거리의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미국은 치안이 좋지 않아 밤 산책을 하기가 부담스럽고 공원에 가로등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는 밤이면 집에 들어와 꼼짝없이 갇혀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술이 엄청 셀 거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덩치가 크고 강해 보이는 인상 때문일 거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술이 약하다 못해 먹으면 바로 아프다. 온몸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혈압이 급격하기 떨어지면서 기운이 빠져 기절을 하거나 쓰러진다. 주변 사람들은 술을 먹다 보면 는다고 했지만 굳이 몸에 좋지도 않은 걸 힘들여 가며 먹고 싶지 않아, 아직까지도 술을 못 마시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에게 유일한 저녁 외출의 이유가 생겼으니 그건 바로 아이스크림이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구글 평점이 높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저녁 11시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3,700개의 리뷰에 평점 4.7. 밤마실 하러 가기 좋은 Mitchell’s Ice Cream은 1953년부터 시작한 가게다. 가족이 운영하는 핸드메이드 아이스크림 집은 속이 쓰릴 정도로 단 미국의 일반적인 아이스크림과의 비교를 거부하는 맛으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인공향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의 맛을 그대로 내는 아이스크림은 부드럽고 적당히 달콤했다.


가게를 처음 오픈한 레리 미첼 할아버지


  금요일 저녁 9시. 저녁을 먹고 난 후 한참 TV를 보다가 출출한 나와 남편은 미첼의 아이스크림집으로 향했다. 운이 좋게 가게 앞 도로에 주차를 할 수 있었던 이날은 평소보다 더 사람들이 가게 앞을 메우고 있었다. 불타는 금요일, 모두가 바나 술집에 가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스크림 집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게다가 이곳은 남녀노소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이니 술집보다 사람이 많은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줄이 길다고 무작정 기다리면 안 된다. 가게 입구 왼쪽에 있는 번호표를 뽑은 후 자신의 순서가 불리길 기다려야 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후다닥 뛰어가 뽑은 번호표위의 숫자는 98번이었고, 전광판에 떠있는 번호는 71번이었다. 27명의 손님이 지나가야 내 차례가 온다. 날씨가 온화할 줄 알았지만 4월의 저녁은 제법 쌀쌀했다. 짧은 밤마실을 기대했기에 외투를 걸치지 않은 나는 호호 손을 불어가며 가게 입구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젊고 멋진 청년이 말을 걸었다. 추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랑 있는데, 무슨 일일까? 잠시 설렜다. 이미 아이스크림을 든 그는 나에게 번호를 내어 주었다. 91번이었다. 좀 더 빠른 번호표를 원하냐며 내민 것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그에게도 호의로 이전 번호표를 넘겼었나 보다. “오, 땡큐 땡큐.” 여덟 계단이나 줄어든 번호표를 받고 연신 땡큐를 외쳤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장난치듯 이야기했다. “내가 귀여워서 번호표를 준거야. 알지?” 남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북적이는 가게와 양보받은 번호표


  추위를 참지 못해 가게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으니 미리 퍼다 놓은 아이스림 포장 상품들을 볼 수 있었다. 포장된 상품을 사면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다양한 맛을 보고 싶은 우리는 꾹 참았다. 뭘 먹지? 뭘 먹지? 지금까지 먹었던 것과는 다른 맛을 먹고 싶었다. 왠지 초콜릿처럼 달콤한 맛이 땡기는 밤이었다.


포장된 상품들

  

  순서가 오기 전까지 계속 먹고 싶은 맛이 바뀌었다.

  “그럼, 컵 하나에 투 스쿱으로 해서 트리플 초콜릿이랑, 블랙 월넛으로 한다?” 더 이상 최종선택을 뒤집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 선포를 하자 드디어 91번이 불렸다. 동그란 아이스크림 두 덩이가 손안에 들어왔고, 우리에겐 아직 98번 번호표가 있었다.

  “우리도 이 행운을 누군가에게 전해주자. 누구한테 주지?”

  나의 말에 남편은 우리 뒤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커플에게 번호표를 넘겼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걸로 봐서 아마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었나 보다. 더 기뻐할 누군가에게 줬으면 좋았을 테지만 순번제의 생태계를 너무 파괴해서도 안 되니 거기서 만족하고 아이스크림을 들고 차에 탔다.


드디어 받은 아이스크림


  이번 아이스크림 조합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트리플 초콜릿을 한 입 먹자 부드럽고 크리미 하면서 진한 카카오가 입안 가득 퍼졌다. 블랙 월넛은 흑임자와 호두가 들어있는 것처럼 고소한 맛이었다. 먹다 보니 출발하기도 전에 아이스크림이 모두 사라졌다.

  “다음에 친구들이 오면 포장되어 있는 걸 사자.”

오지도 않을 친구들을 위해 항상 나중을 기약한다. 샌프란시스코 최고의 아이스크림을 친구들에게도 맛 보여주고 싶으니 말이다. 술 마시는 나이트 라이프는 제공하지 못해도, 달달한 기쁨이 있는 나의 샌프란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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