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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Apr 26. 2024

책은 머리로 하는 여행

쓰고 또 읽는 사람

류시화의 신간 에세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어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다.

한 일본 작가의 말을 인용한 구절이다.

”처음부터 말이 통하는 사람과는 같은 책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처음부터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책을 전혀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중략) 가능한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좋다. 같이 읽은 책의 수만큼 말과 고독이 통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그 책을 추천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단절되어 가는 세계에 대한 최선의 저항 수단이다. “

튀르키에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말도 인용했다.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것은 특히 불행한 시기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세계를 넣고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책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준다. 책처럼 오래되고, 간편한 매체가 또 있을까. 종이에 적힌 글을 통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기도 하고, 실존하지 않은 인물의 삶을 훔쳐보기도 하며, 지금껏 알지 못한 새로운 지식과 만나기도 한다. 활자로 적혀있는 누군가의 머릿속 이야기.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생각과 경험, 이야기와 지식을 내 머릿속 어느 한 군데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 짜릿하다. 읽는 행위는 눈으로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나의 뇌에 활자의 의미를 해석해 저장하는 고차원 적인 일을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류시화의 에세이에서 인용한 첫 번째 구절이 너무 찰떡같은 비유다. 하나의 책을 읽으면 그 이야기를 읽은 다른 사람들과도 책 속의 세상을 공유하게 되니 당연히 한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는 말이 통할 수밖에. 같은 세상의 일부분이 머리 안에 있으니 말이다. 특히 요즘처럼 모두에게 있는 손안에 다른 세상, 휴대폰과 그 속의 각종 미디어는 내 취향과 입맛에 맞는 알고리즘으로, 관심분야를 좁히며 나를 편향적이고 단절적인 인간으로 만드는데 기여하는가 하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시간까지 줄여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다양한 분야의 독서는 말하지 않아도 공유하는 세상을 넓혀갈 수 있는 무기가 된다는 점에서 참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다. 오르한 파묵이 말한 것처럼, 가방 안에 책이 있으면 어떤 시간도 두렵지 않다. 책을 읽는다는 건 가만히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






책을 좋아하게 된 건 아무래도 어릴 적, 엄마의 영향이 크다. 엄마는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다양한 전집들을 많이 사다 줬다. 당시만 해도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 어린이날 선물 같은 것도 없었는데, 엄마는 교육에 만큼은 관심이 많았나 보다. 엄마가 사놓은 전집에는 동화도 있었고, 고전도 있었다. 영어로 된 것도 있었고 생물과 우주에 관한 다양한 책들이 책장 가득 꽂혀있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은 나보다도 빨리 한글을 깨쳤다. 아마 엄마가 나와 동생에게 동시에 같은 동화책을 읽어주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엄마가 책을 펼치면 한 명은 오른쪽에, 한 명은 왼쪽에 앉아 책을 함께 읽었다. 엄마의 목소리와 손가락을 따라가며 글자를 보았고 글 속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렸다. 듣고, 보고, 생각하는 학습법은 다양한 감각기관을 동시에 활용하여 뇌에 더 많은 자극을 주기에 아이들의 발달에도 효과적이다. 젊었던 엄마는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그저 딸들에게 그렇게 책을 읽어주면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라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리 엄마는 올바른 학습법이나 효과적인 교육법이라는 DNA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엄마 아래 자란 탓인지 그녀가 없을 때에도 우리의 독서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엄마가 하던 것처럼 테이프 소리에 따라 동화책 속 글자에다 손을 짚었다. 카세트테이프의 성우들은 눈앞에 그림을 펼치듯 생생하게 책을 읽었고, 호랑이가 나오거나 도깨비가 나오는 어떤 책들은 너무 무서워 중간에 끄고 엄마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우리의 독서 후 활동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징그러운 곤충들에 대한 설명이 가득한 책을 보고 난 뒤에는 놀이터에서 쥐며느리나 무당벌레들을 보며 책을 다시 복기하기도 했고 엄마와 함께 갔던 기억을 더듬으며 버스를 타고 금호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기도 했다. 엄마와 동생 덕분에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성인이 되었다.


오늘날의 나는 가급적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려 노력한다. 정치외교를 전공한 탓인지 사회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다. 나의 관심사인 환경, 예술, 심리, 철학 관련 책들도 좋아하고, 현대 시류에 맞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과학기술 분야의 책들도 열심히 읽는다. 소설은 주로 고전을 읽었었는데, 몇 년 사이에 현대작가들이 낸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되며 나와 동시대에도 천재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소설은 옛날 사람만 쓰는 거라는 이상한 편견이 있던 나에게 오늘날의 작가들이 쓴 작품들은 나 역시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용기를 주었다. 에세이 장르를 접한 것도 오래지 않은 최근 몇 년 사이 일이다. 진솔하고 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을 풀어내는 작가들의 글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작가들 마다 다른 문체들을 보며 에세이의 매력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일간 이슬아’를 구독하며 등단하지 않고 스스로 작가가 된 ‘이슬아’ 작가를 알게 되면서 나 역시 작가가 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 읽는 것에서 그치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책을 통해 할 수 있었다.


글자와 단어, 문장 속에서 글을 쓴 사람의 이야기를 파헤쳐 나가며 이해하는 기쁨은 보물찾기 같다. 특히 글을 쓰는 요즘에는 내가 활자로 새겨 넣는 말들이 내 머릿속의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는지 적절한 표현법과 단어들을 선별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에, 누군가가 쓴 글을 읽을 때에도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바에 대해 더 곱씹어 본다. 생산자가 되고 보니 소비자일 때도 글자 너머 누군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한국어 종이책을 찾기 어려워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고 있다. 핸드폰이나 아이패드로 읽는 글은 슥슥 넘기는 종이의 질감이 없어 책 읽는 맛이 조금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모국어 콘텐츠를 이토록 편히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기업들의 이윤추구 극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광고나 유튜브 알고리즘과는 달리 전자책 플랫폼은 과학기술과 미디어의 발달이 우리 삶에 편의성과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좋은 예다. 그 덕에 요즘은 팀 마샬의 ‘지리의 힘’, 박완서의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동시에 읽고 있다. 어딜 가더라도 휴대폰이나 아이패드만 들고 있으면 든든한 이유는 이제 여러 권의 책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다가도, 약속 장소에 너무 빨리 도착해 누군가를 기다리더라도 나는 새로운 여행지로 갈 수 있다. 실은 글을 쓰는 지금, 나는 하와이 호노룰루에 와있다. 여행지에서 읽는 책은 세상 어느 곳에 있어도 내가 변함없는 같은 결의 사람임을 알게 해 주고, 동시에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움을 깨닫게 해 준다.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이고, 책은 머리로 하는 여행이라고 김남희 작가가 말했다.(그녀의 책을 집에 두고 왔기에 정확한 구절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비슷한 뉘앙스다.) 책과 함께라서 나는 참 든든하다. 내일 아침에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지리의 힘’을 계속 읽어야지.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이 미국땅이 된 역사적 이유와 지리적 이점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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