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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Apr 19. 2024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너희 없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나에겐 초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함께 한 친구 둘이 있다. 쏭과 다돌. 우리는 삼총사다. 같은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갔으며 시골에서 서울로 함께 상경해 대학생활을 했다. 대학원 생활과 취업준비를 함께 하고, 쏭과는 같이 대전에 일자리를 잡아 결혼 전까지 거의 매일을 함께 보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다돌은 대전으로 파견을 신청해서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까지 우리는 지치지 않고 만났다. 이들이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 그야말로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나와 같은 해에 영천이라는 소도시에 함께 태어났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어느 날 다돌이가 자신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쓴 일기를 찍어 보냈다. 내가 아파서 조퇴했는데, 자신도 걱정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하루가 그 애의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우리는 과거를 나눈 사이다. 쏭은 초등학교 5학년때 만든 문예집 ‘영화신문’을 찍어 보냈다. 우리 셋이 쓴 운문과 산문들이 놓여있었다. 그때도 꽤나 글솜씨가 좋았던 우리 셋의 글이 날긋날긋한 종이에 찍혀 있는 것을 보니 재미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도 우리가 보낸 날들이 누군가 일기와, 편지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참 좋다.


다돌이의 일기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우리의 사이는 좀 더 공고해졌다. 내가 졸업한 영화초등학교는 영천 내에서도 규모가 작았기에, 중학교에 올라가니 내가 아는 이들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초등학교 때는 활발했지만 중학교 진학과 함께 진하게 찾아온 사춘기로 나는 왠지 조금 주눅이 들고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 학년에 학생들도 더 많아졌고, 성적도 '분수와 소수의 개념을 이해합니다.', '산성과 염기성을 구분하며 과학실험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처럼 말로 풀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수, 우, 미, 양, 가는 물론 점수와 석차까지 분명하게 찍혀 나온다고 했다. 과목마다 선생님이 다른 것도 생소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하는 순간, 나를 어떻게 포장해 보여야 하는지 몰라 어설프고 어정쩡하고 불안했지만 그런 내 옆에 같이 1학년 2반을 배정받은 쏭과 다돌이 있었다. 그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3년 내내, 우리는 좁아터진 학생식당에 긴 줄을 피해 도서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식당이 한적해졌을 때 점심을 먹곤 했다. 도서실은 늘 사람이 없어서 우리의 아지트로 제격이었다. 보통은 수다를 떨거나 공기 같은 게임을 하며 놀았지만 가끔은 그곳에 꽂혀있는 책을 읽기도 했다. 쏭은 우리보다 세 살 많은 언니가 있어 그녀에게 전해 들은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도 이야기해 주었다. 고등학교에서도 학내 기자로 활동하던 쏭의 언니는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어려운 책 속 철학 같은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매일 점심시간의 수다는 서로에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가 가진 생각을 많이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태국의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쏭의 언니는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을 몸소 살고 있다.

  학교를 마치고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청소와 종례를 마치고 나면 학교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는 우리 집에 모여 미숫가루를 타먹었다. 학교에서 받은 흰 우유는 영 먹기 싫지만 미숫가루와 꿀을 타 얼음을 띄워 먹으면 술술 넘어가고 배도 불렀다. 쏭은 말이 없는 나의 둘째 동생의 눈치를 많이 보곤 했었는데, 지금은 둘이서 콘서트에 갈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다.


  우리는 공부를 곧 잘했다. 나란히 전교 1, 2, 3등을 했고 그 덕분에 실업계에서 인문계로 전환하는 고등학교의 첫 기수로 장학금을 받고 스카우트되었다. 3년 동안의 수험생활은 힘들었다. 나의 머리는 '시험'을 잘 치는 쪽으로는 크게 발달하지 못했던 것 같다. 똑똑하지 못한 머리 탓에 나는 엉덩이로 공부했다. 오래 앉아 있으면 그만큼 성적이 오른다는 어른들의 거짓말을 믿으면서. 일요일 하루, 그것도 오전시간만 조금 쉬며 공부했던 그때도 쏭과 다돌은 나와 함께였다. 모의고사 때 그들이 나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으면 축하보다는 괜히 마음이 쓰리고 초라해졌지만 이내 둘 때문에 힘을 냈다. 당시 착하고 순수했던 우리가 한 최고의 일탈은 우울했던 저녁시간, 학생식당으로 가지 않고 논두렁을 달려 짜장면을 먹으러 간 거다. 대입 논술 공부를 위해 책을 읽고 토론하던 저녁들이 지나 우리는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자 친구들과 조금 멀어졌다. 나는 여대에 입학했고, 그들은 남녀공학에 다니며 학교 생활에 엄청난 열정을 붙였다. 둘은 동아리며 학과 활동과 동기, 선배들과의 만남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찌 된 영문인지 OT와 새내기 배움터를 한다는 안내를 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한 나는 모두가 친한 가운데 나만 모르는 환경 속에서 대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 했던가. 새로운 터전 서울에서 많은 이들에 쌓여있지만 정작 나는 외로웠다. 처음 나에게 손을 뻗은 기독교 그룹의 언니들은 고등학교 때처럼 공부하라는 이상한 조언이나 해주었고 그들의 조언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시기를 늦추기만 했다. 그러던 사이 나와 늘 함께 하던 내 친구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그룹을 형성해 나갔고, 나는 그것이 나를 끊어내는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참 겁이 많았다. 19년을 같은 지역에서 같은 사람들을 보며 살아온 탓이다. 1학년 1학기의 절반이 흐르고 나서야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새로운 체험을 위해 연합 봉사동아리 활동도 하고, 걸스카우트 연구대 활동, 청소년 회의 등에 참여했다.  조금 더 재미있는 동아리 활동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대학에 입학해서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필요'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해야 하는 일들을 찾아서 했다.


  친구들은 다시 돌아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많은 이들을 만나고 지금껏 해보지 못한 다양한 시도들을 하며 더 자라고 있었다. 방송부를 하던 쏭, 학내 봉사동아리와 기억나지 않은 많은 프로그램들에 참여하던 다돌은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잡고 나서 예전처럼 엉겨 붙어 지내기 시작했다. 더 똑똑해진 그들을 통해 더 많이 배웠다. 늘 같은 곳에서 비슷한 것만을 보던 우리는 자신의 색깔을 조금씩 더 가지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부터는 '영천학사'라는 지역 기숙사에 같이 살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삼총사가 되었다. 서울에 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이 한 달에 10만 원만 내면 살 수 있었던 그곳에서 우리는 또다시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쌓았다. 같이 클럽에 가서 밤을 새우는 일탈을 했지만 서로의 부모님께 사전 보고를 하는 것을 잊지 않는 그런 시간들이 흘러갔다.


  황금 같았던 대학생 시절이 지나고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하던 시절, 나와 다돌은 대학원에 들어갔고, 쏭은 복수 전공 이수를 위해 학교에 남아 더 공부했다. 우리는 취업시장에서 많은 좌절을 맛보고 난 이후, 나는 대전의 연구단지에 인턴으로 자리 잡았고, 뒤이어 쏭도 대전에 내려와 취업을 했다. 다돌은 국제 개발 직군에서 최고의 직장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의 한 공공기관에 입사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며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와 쏭은 대전에서 4년간 함께 살았다. 각자 떨어져 살게 된 이후에도 우리는 거의 매일 저녁 만났다. 매일 만나도 지겹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돌이 대전에 내려왔을 때는 시집가기 전 뭐든 같이 해보자며 매주 정기적으로 만나 사업 아이디어를 짜고, 뮤지컬 공연도 함께 했다. 당시 우리가 진행하던 사업은 친환경 비건 가죽으로 만든 핸드백 제조였는데, 그를 위해 멕시코에서 선인장 가죽까지 수입했지만 뒷심이 부족해 그 가죽은 여전히 다돌이네 집 베란다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대전에서 함께지내던 우리, 평소 내가 하던 뮤지컬도 다돌 결혼 전 추억만들기를 위해 셋이 함께 했다.


  결혼 후, 미국에 온 지금.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 다돌이는 아기를 낳아 육아에 매진하고 있고, 쏭은 대전에서 일하며 열심히 연애 중이다. 쏭은 일을 하다 보니 최근에는 휴직 중인 다돌과 이야기할 기회가 더 많다. 쏭과 살며 지낸 시간이 길었지만 요즘 점점 길어지는 다돌과의 대화시간으로 내 일생이 둘에게 할애한 시간이 평등해지고 있다.


  쏭과 다돌, 그 둘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자매와도 같은 존재다. 우리가 만나 지금까지 함께 기억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억겁의 인연이 쌓여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 각자의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 위 조상들 까지도 만나고,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했던 사건들이 겹치고 겹치고 겹쳐져 우리가 작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오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우리를 아는 이들은 그런 우리의 우정을 부러워한다. 심지어 엄마, 아빠 까지도. 그들 없이 나를 설명할 수 없기에 나는 그들이 없었던 나를 상상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었다면 아마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다.


  유안진의 시,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읽으며, 다돌과 쏭을 떠올린다. 나에게 가장 큰 행운처럼 찾아온 두 친구들은 허물없이 나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이들이다. 내 친구들이기에 좋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도 좋은 사람들이다. 가족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크기를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사람.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시 지란지교를 꿈꾸며 중)”이다. 멀리 있어 애틋한 마음이 커진다. 오늘은 나의 일부분을 만들어 낸 그 친구들의 얼굴이 더더욱 보고 싶다.


지란지교를 꿈꾸며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은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아내나 남편, 형제나 제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친구와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는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쳐 주고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으면 된다

우리는 흰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지 않을 것이며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진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되
미친듯이 몰두하게 되길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도 같아서
요란한 빛깔과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우리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은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창문을 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면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손이 작고 어리어도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날 홀연이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니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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