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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Apr 16. 2024

사회의 빛과 소금

장래희망은 '직업'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잖아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지 않아 가정통신문과 함께 질문이 가득한 종이를 받았다. 나의 신상정보를 묻는 질문들. 가족 구성원의 수나 집이 아파트인지 주택인지를 묻기도 했던 것 같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 채울 수 없는 질문들, 그중 ‘장래희망’이 있었다. 장래희망.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너무 어려운 단어의 조합이었고 나는 엄마에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었다.

  “이건 꿈이 적는 거야.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를 묻는 거란다.”

나는 딱히 되고 싶은 게 없었다. 그대로도 괜찮았던 나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나 보다.

  “우리 진아는 뭐가 되고 싶어?”

  “몰라.”

  “그럼 의사가 되는 건 어때?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고 엄마랑 외할머니도 아프니깐 치료해 줄 수 있어.”

  “응, 그럼 나는 의사가 될게.”

그로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나의 꿈은 의사였다. 진정으로 의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아는 직업이 몇 없었다. 내가 접하는 어른들은 선생님, 슈퍼 아줌마, 중국집 아저씨 등이었고, 토목업을 하는 아빠와 옷 가게를 하는 엄마는 자신의 직업을 나에게 추천하지 않았다. 가끔 병원에 가면 보는 의사 선생님. 흰 가운을 입은 그 사람만이 조금은 덜 평범해 보였고 조금은 멋져 보였다. 게다가 엄마 말처럼 아픈 사람을 고쳐주지 않던가.

  세뇌된 것처럼 되뇌었던 의사라는 장래희망이 엄마의 청사진임을 중학생이 되어서야 눈치챘다. 의사가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에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지만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공부해야 하고, 일에 대한 보상으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 수 있기에 엄마, 아빠의 자랑이 된다는 것을. 공부는 어떻게든 하겠으나 비위가 약해 회는커녕 족발도 먹지 못하는 내가 지혈을 하고 해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의사 대신 내가 하고 싶고 엄마 아빠를 만족시킬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림그리고 책읽고 글쓰는걸 참 좋아하는 나. 왜 나의 엄마, 아빠는 좋아하는 일 말고 필요한 일만 강조했을까?







  아빠는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했다. 빛과 소금. 그가 필요한 사람을 묘사하는 단어였다. 열심히 새로운 장래희망을 찾던 어느 날, TV에서 한 광고가 흘러나왔다. 흑백 화면에 굶주려 뼈밖에 남지 않은 아이들의 사진이 나오는데, 그를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저 사람들은 불쌍한 애들 사진을 보면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비웃고 있는 거야?’ 화가 나 가슴이 쿵쾅거릴 때 즈음 까만 화면에 하얀 글씨가 떴다. <What is worse? Laughter or Indifference?, 무엇이 더 나쁜 걸까요? 비웃음인가요? 무관심인가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지구 반대편 굶어 죽는 아이들을 향한 조롱에 화가 났지만 정작 나는 그들에게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광고 하나로 새로운 관점이 생긴 이후 나름의 리서치를 진행했다. 세상엔 굶어 죽는 아이가 7초에 1명씩이라니. 2001년, 시골에 사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은 숨을 쉬는 동안 밥이 없어 죽어 가는 생명들을 생각하며 커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는 몰랐지만 나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국제무대에서 일하며 생사가 달린 문제에 직면한 이들을 돕는 것이야 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낭만주의가 머릿속을 가득 매운 청소년기, 나는 직접 고된 일들을 하고 싶었다. 아프리카로 달려가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깨끗한 식수를 공급할 우물을 파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어렴풋한 상상만이 가득한 머리에 대입을 위한 교과 정보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사교육이 없는 시골에서 우직하게 앉아 엉덩이로 공부했던 나에게 가장 큰 동력은 ‘꿈’이었다. 수능만 끝나면 월드비전으로 후원하는 네팔의 어린 소녀를 만나러 가고, 구호 개발 프로젝트가 이루어지고 있는 마을을 방문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렇게 나는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고,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국제 개발과 원조를 하는 것에 일생을 쏟고 싶었다.    


  하지만 순진했던 나는 그 꿈을 이루는 구체적인 방법을 잘 몰랐다. 나의 꿈은 고등학교 시절 3년간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달릴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잘 짜인 입시의 체제 속에서 최선을 다하면 될 뿐 스스로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대입이라는 거대한 목표가 이루어진 이후 나는 반짝이는 꿈으로 가는 길을 잃었다. 대학 공부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너무 재미있었다. 똑똑한 이들은 전략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수업을 골라 듣고, 취업이 잘 되는 교과목을 들으며 대학 강좌를 이용했지만 순진한 나는 미술사학과 철학, 인류문화처럼 이끌리는 수업들을 들었다. 취업에는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그 수업들은 내 삶과 주변을 더 깊고 넓게 느끼는데 도움을 주었다. 국제 정치와 국제 개발, 북한개발협력 같은 수업들을 들으며 모호하기만 했던 국제 개발의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고, 그 역시 ‘선의’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업임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나의 꿈은 사(死) 선에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이었지만 직접 우물을 파거나 구호 물품을 나눠주는 것보다 그를 위한 정책과 전략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대학 3학년, 꿈은 여전히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고 꿈을 이룰 확실한 방법으로 외무고시에 도전했다. 시험을 통과하면 길이 열리니 쉽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일 년에 30여 명을 선발하는 외무고시는 바늘구멍과 같았다. 2년 동안 공부했지만 1차를 통과하는 것도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미련 없이 시험에서 손을 떼었다. 시험을 포기한다 했을 당시 아빠가 나를 쓸모없는 이로 취급했던 기억이 아직도 가슴을 후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아빠가 말한 빛과 소금은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는 것이었나 보다. 실망스러운 딸이었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여전했던 나는 휴학 없이 4년 만에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며 국제기구에 진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대학원 졸업 즈음 알게 되었다. 엄청난 두통에 시달려 MRI를 찍은 나는 ‘뇌하수체 선종’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꿈을 위해 계속되는 도전은 무섭지 않았지만 곧 내가 죽을까 두려웠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은 타인들을 향해 가 있던 마음을 나에게만 쏟아붓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몸과 마음이 편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 시작했고, 일 년 반의 백수생활 끝에 대전에 있는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두 번의 이직 끝에 한 과학기술대학의 교직원이 되었다.    






  한국은 OECD국가 중 유일하게 공적 원조 기금을 받던 수혜국에서 공여국이 되었다. 국토 면적도 좁고 천연자원도 부족한 이 나라가 오늘날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근면성실한 국민들의 태도와 개발 초기 국가 주도적 경제 부흥 운동, 엄청난 교육열에서 찾을 수 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일찍 할아버지를 여의고도 홀로 떡을 팔며 장을 떠돌던 친할머니와, 병으로 누운 외할아버지를 두고 4명의 자식을 거둬 먹이려 산을 넘으며 고추를 팔던 외할머니가 바로 나의 부모와 내가 오늘처럼 살 수 있는 이유였다. 자식에게는 좀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은 부모세대의 희생과 노력이 거미줄처럼 엉켜 사회를 지탱하는 단단한 안전망이 되었다. 나는 이런 우리의 경험을 유산으로 다른 저개발국을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개별국가의 국내 상황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사례 중 적용하여 효과가 있을만한 방법들을 선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 교육과 과학기술분야에서의 개발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와 문화, 사회를 급속도로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었다. 비록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공부한 내용을 써먹진 못하지만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에서 나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못다 펼친 꿈에 대한 위안을 삼고 있다. 특히 30%의 학생들이 개발도상국 출신의 외국인임을 감안했을 때 그들에 대한 교육은 국제 개발 차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우수한 인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개별 국가의 미래 산업을 일구는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캠퍼스에서 졸업한 한 인도네시아 박사는 인도네시아의 최연소 대학총장이 되었고, 많은 파키스탄 졸업생들이 자국의 연구자가 되어 과학기술을 이끄는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결국 학생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집중하고 노력한 결과가 자국의 사회 발전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일하며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외국인 학생 유치와 국제 협력, 홍보 업무를 담당하던 나는 직업에서 분리되어 ‘백수’라는 타이틀을 목에 걸고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가졌던 ‘직업적’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하고 있는 일에서 그 의미만큼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직장을 떠난 사람이 되었다. 일 말고도 세상 속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내면은 성장하지만 바깥으로 이로움을 창출하지는 못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가끔은 혼란스럽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 잠시 쉬고 있고, 남은 여생을 일할 것이니 걱정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내면을 다듬는 것과 나를 둘러싼 외부를 다듬는 일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인생은 바라는 모든 것을 선물해 주진 않는다는 걸 이미 깨달았기에 욕심내지 않으려 한다.

  ‘장래희망’은 내가 되고 싶은 ‘직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고 싶은 바여야 한다. 장래가 되어버린 오늘, 나는 여전히 꿈을 꾼다. 내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회사를 다니던 중에도 끝없이 꿈꾸던 UNDP에 지원했고 스물아홉, 최종면접에 까지 합격했지만 파견 장소가 르완다라는 것을 알고 나서 스스로 포기했었다. 그때는 내 나이가 너무 많은 줄 알았고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가는 게 너무 큰 도전인 줄 알았다. 엄마, 아빠가 아프리카는 안 된다며 나를 말렸을 때, 나는 그들의 의지가 아닌 나의 의지로 그 자리를 포기했었다. 막상 기회가 왔을 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그를 놓치고 만다. 그때의 내가 그랬다.


  나이가 더 먹고, 인생이 던져주는 다양한 장애물을 만난 나는 더 이상 평탄한 미래를 그리지 않는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무엇이든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만 내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엔 정말 열심히 해보고 싶다. 절대적 빈곤이 많이 퇴치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오늘날의 세계에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무분별한 개발이 지역사회를 와해하고 아름다운 토착 풍속을 망가뜨리는 사례 역시 많다.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던 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알래스카의 이누이트족 20대 청년들의 자살률과 범죄율은 급격하게 올라갔었다. 인도 북부의 잠무, 카슈미르 지역에서도 급격한 산업화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오래된 미래]에서 기술하듯 환경을 오염시키며 젊은 세대를 토착 문화로부터 분리시키며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게 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아직 지구촌 곳곳에는 자신의 풍속을 유지하는 토착민들이 살고 있다. 그들과 아름다운 풍속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그들을 근대화의 편의성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그보다 각 지역과 문화에 맞는 ‘지속가능한 개발’, ‘친환경적 개발’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어떤 방법일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주변을 살피는 활동들을 해나가고 싶다. 국제개발분야에 종사하고픈 고 스펙자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자원봉사 자리마저도 이미 꽉 차있다. 그럼에도 꿈이 있고, 열정이 있고, 주변을 살필 여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꿈의 언저리를

여전히 어슬렁 거려볼 참이다. 스무 살의 나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여전히 어리바리 하지만, 앞머리가 무성하고 뒷머리가 없는 그 기회가 다가온다면 이번엔 꽉 하고 움켜쥘 테다. 내가 정의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ps. 꿈을 쫓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미있게 사는것도 중요한 것 같다. 내일은 하루가 지나면 오늘이 된다. 결국 다가오지 않는 ‘장래’의 희망보다 오늘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역시도 소중한 일이다.  그걸 잊지 말아야지.

엄마와 함께 칡덩굴을 꺽고 마당에 마른 장미와 솔방울, 풀잎을 뜯어 만든 리스. 모녀의 핏속엔 자연과 예술을 향한 사랑이 끓고 있다.


예쁘게 꾸민 대전 집, 위 사진들 처럼 나는 심미적인 것, 낭만적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제와 돌이켜 보니 내 꿈은 너무 무거운 대의만을 지향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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