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캐년 / 127시간)
생각한 것만큼 장엄하거나 압도적이지 않았다. 깊이 파인 협곡을 보면 서울에서 마주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린 그랜드캐년 앞에서처럼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자연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예술가의 눈을 통해 본 그곳의 모습이 더 인상 깊었다.
남편과 장거리 부부를 하던 시절, 거대한 땅덩이를 가로질러 샌프란시스코에서 휴스턴으로 이사하는 남편과 동행하러 회사에다 열흘 휴가를 냈다. 샛길로 새지 않고 운전만 한다면 3일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 1,956마일, 3,128킬를 우리는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대륙의 절반을 건너는 여행. 우리는 요세미티, 유니버설 스튜디오, 그랜드캐년을 둘러보는 동선으로 일정을 짰고 어느새 약 8일 간 길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랜드캐년에 도착한 건 오후 7시쯤이었다. 때마침 일몰 즈음이라 선셋 포인트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이미 그랜드캐년을 다녀온 몇몇 지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비현실적인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이야기했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버스에서 내려 협곡을 맞이했을 때, 나는 너무 큰 기대 때문이었는지 구름 잔뜩 낀 하늘 아래 황량해 보이는 황갈색의 절벽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작은 것들에도 쉽게 감동하는 나인데, 이렇게 큰 대자연을 마주하고도 별 생각이 안 들다니, 오히려 조금은 실망스러운 광경에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데 나는 왜 이러지? 내가 괜찮은 게 맞나? 하며 자기 검열을 했다. 자연을 사랑한다고 노래 부르던 사람이 이 넓디넓은 대자연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지 못한다니, 시신경이나 감각 수용체가 고장 난 건 아닌가에 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활하고도 푹 꺼진 땅은 분명 인식할 수 있는 것이었고 나는 그저 황량한 이곳에 마음을 주지 못했을 뿐이었다.
20만 년 전부터 쌓여온 퇴적암층이 북아메리카 판과 태평양 판의 충돌로 융기하면서 고원을 형성했고, 콜로라도 강이 흐르며 강의 침식작용에 의해 그랜드캐년이 만들어졌다. 저 멀리 콜로라도 강이 굽이 치고, 분명 이 사막 기후에서도 크고 작은 생물들이 살아가며 삶의 터전을 이루겠지만 먼발치에 서있는 나에겐 그 어떠한 생명력도 전해지지 않았다. 잔뜩 낀 구름에 결국 지는 해를 보지 못한 채 어두워져 가는 국립공원을 내려와야만 했다.
저녁이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 또다시 그랜드캐년을 찾아 협곡 아래로 내려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날씨는 맑았고, 청명했지만 처음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을 다시 찾기란 어려웠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 초록의 부재가 이곳을 자연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구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녹색 공간에 둘러싸여 살았다. 시선이 닿는 어디든 산이 있었고, 산에는 나무들이 빼곡했다. 아파트의 작은 정원도, 가로수도 늘 그곳에서 내가 사는 공간과 자연은 초록색이라고 일러주었다. 주황빛을 머금은 황토색 퇴적물은 미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이 지역에 사는 이들에게는 고향의 품처럼 느껴질 테지. 내가 푸른 산을 뛰어다닌 것처럼, 협곡을 동네 뒷산 마냥 오르내린 누군가가 있을 테니 말이다.
영화 127시간의 주인공 아론 랠스턴은 실제 인물로 그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열정적인 산악인이자 모험가인 아론은 집과 가까운 곳으로 짧은 여행을 떠날 때면 휴대폰을 소지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 푹 빠지기 위해 세상과 자신을 잇는 모든 것을 단절하기 위해서. 그는 유타주 블루존 캐년에서 하이킹을 하던 중 추락 사고를 당하게 된다. 늘 다니던 익숙한 곳이기에 그는 방심했다. 한 순간의 실수로 그는 거대한 바위에 팔이 끼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영화는 바로 그 127시간 동안 그가 극한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보여준다.
좁은 협곡 속, 바위에 끼여 있는 동안 고갈되는 체력과 물, 이로 인한 심리적 압박과 낮아지는 생존 가능성이 빠른 속도로 바뀌는 화면을 통해 긴장감 있게 전달된다. 단순한 생존 이야기라면 5일간의 시간 동안 아론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형태로 진행되었겠지만 이 영화는 아론이 갇혀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가족과 친구들, 자신이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회상의 장면이 영화 전반에 담겨있다. 결국 이 영화는 인간의 강인한 생존 본능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더 큰 감동을 주었다. 특히 나라면 하지 않을 선택들을 계속하는 주인공의 무모함과 결국 자신의 팔을 잘라 탈출에 성공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보며 인간은 정말 다양한 모양으로 빚어져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블루존캐년은 그랜드캐년과 마찬가지로 퇴적층의 고원이 강에 의해 침식되어 이루어진 지형이라는 점에서 큰 유사점을 지니지만 그 규모가 작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 더욱 고립된 느낌을 준다. 그 때문에 주인공이 구조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5일을 기다렸지만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랜드캐년을 디디며 그 영화가 떠올랐던 건 국립공원을 걷는 동안 극단적이거나 위험한 요소를 만나지 못한데 있다. 비슷한 지형이지만 어째서 누군가는 목숨을 잃어버릴 정도의 위험에 처하게 될까 궁금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잘 닦인 길 위로 차근차근 오르내리는 하이킹 코스는 바위와 돌로 이루어진 한국의 국립공원보다 평탄하고 쉽다. 사고가 날 위험 요소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짜릿한 아드레날린을 요구한다. 그런 이들이 모험가, 탐험가로 불리는 이유는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한계를 깨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규칙을 무시한 채 더 짜릿한 인스타 그램 사진을 위해, 더 위험한 모험을 위해 자신을 내 던지는 이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여러 차례 확인하며, 어쩌면 무지함이 용감함의 원천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나 역시 잘 모를 때는 두둑한 배짱으로 우선 해보자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어떤 것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은 위험 요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더 겁쟁이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무책임함과 무지함이 용감무쌍함으로, 도전정신으로 둔갑할 수 있다. 누군가의 행동은 결과에 따라 재평가된다. 무모하게 안전장치 없이 엘 케피탄을 오르는 데 성공한 알렉스는 최고의 등반가로 칭송을 받지만, 멋진 사진을 위해 아찔한 곳에서 사진을 찍다 떨어져 죽는 사람이나, 알렉스와 같은 도전에 실패하여 죽음을 마지한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동반한 어리석음에 대한 질타를 동시에 받게 된다. 127시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팔을 자르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영웅일까. 바보일까. 극단의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남은 것은 칭송받아야 하지만 애당초 그런 위험을 지는 것이 옳은지, 칭찬받을 행위인지 가치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랜드캐년에서, 익숙하지 않은 전경을 바라보며, 자연스럽지도, 그렇다고 비자연스럽지도 않은 그 고원 위에 서서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지구의 역사가 적힌 퇴적층과 지질구조가 눈앞에 있구나. 그걸 마주한 내가 여기 있구나. 스치듯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