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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Jun 17. 2024

유유자적 물아일체

하와이 / 모아나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하와이라면 유치원에서 1박 2일간 '캠핑'이란 명목으로 부곡하와이를 간 게 다였다. 부곡하와이에서 하룻밤을 자야 했던 그날, 오렌지 빛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바깥 가로등 불빛과 방을 빼곡하게 채웠던 아이들의 작은 몸통들이 생각난다. 7살인 나는 그날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다. 선생님이 따뜻한 손길로 다독여 줬지만 보고 싶은 엄마에 대한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엄마와 9,000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눈물이 나기도 했지만 이젠 아니라고 말하는 게 좀 더 정확하겠다. 어른이 되어 미국에 시집을 온 나는 태평양 가운데 덩그러니 떠있는 작은 섬 하와이를 작년과 재작년을 통틀어 4번이나 다녀왔다. 그곳에서도 부곡하와이에서 처럼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라기 보단, 엄마에게도 지상 낙원이라는 이곳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따뜻한 열대기후의 섬이 내게 가져다주는 이미지는 야자수와 푸르른 하늘, 서퍼들은 과 친절한 사람들, 훌라춤이었다. 미국의 제주도, 세계인의 휴양지인 하와이는 총 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제도다. 태평양의 지상낙원이라는 별명을 들어온 터라 화산 활동에 의해 솟아난 신비로운 지형과, 여유로운 사람들, 이국적인 꽃들, 깨끗한 바다를 꿈꿨었다. 하와이를 휴식과 레저를 위한 장소로만 그렸던 나의 환상은 실제로 마주한 와이키키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뾰족하게 솟은 높고 낡은 빌딩들이 가득 차 있는 와이키키는 상업시설과 여행객을 위한 콘도와 호텔들로 자연과 거리가 먼 도시의 이미지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휴양지에 가도 방문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있을 터인데, 나는 어찌 원시의 자연만을 꿈꿨는지. 가끔은 순진하고 바보 같은 내 환상은 과도한 낭만주의자적 자아의 힘이 너무 커져서 나왔다는 생각을 한다. 하와이의 저녁은 기분 좋은 온도와 습도로 관광객들을 밖으로 끌어내었고, 나 역시도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야자수 가로수와 횃불이 짚어진 해변가의 인도를 걸었다. 거리에서 쉐이빙 아이스를 먹으며 군중들 사이를 지나다니니 번쩍이는 쇼핑센터와 길거리에 즐비한 가게들이 그리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가끔 스스로가 편의 시설이 필요한 현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하와이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스노클링을 하는데 할애한다. 바닷속에 머리를 담그고 수면 아래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나에게 현대인의 자아란 없다. 맑고 투명한 바닷속에 몸을 담그면, 시간은 멈춘 듯 고요해진다. 나는 주로 산호초 안의 지역인 샥스코브(Shark's Cove)에서 스노클링을 하며 다양한 물고기들을 관찰했다. 둥그렇게 파인 만 지형인 이곳은 썰물 때 들어온 각종 해양 생물들이 빠져나가지 못해 만들어진 거대한 천연 수족관이다. 작은 상어가 잔뜩 경계하며 몸을 숨기고, 커다란 바다거북이 온순하게 해초를 뜯어먹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 나는 나를 잃어버린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지구에 살고 있는 하나의 생명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어떤 존재가 되어버린다. 물아일체의 환상 속에서 빠져나와 나를 스스로 자각할 때는 내가 혹 산호 초 넘어 먼바다로 나온 것은 아닐까 하며 수면 위의 해안을 확인하기 위해 물 밖으로 나올 때다. 아무리 모험심이 넘치는 나라지만, 죽는 것은 두렵기에 안전한 만 밖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나. 그렇게 자연과 하나 되면서도 산호초를 넘어가지 못하는 나를 인식했을 때, 디즈니 영화 "모아나"를 떠올리게 한다. 모아나는 자신을 둘러싼 안전한 경계를 넘어 대양으로 나아가며, 위기에 빠진 마을을 구하는 모험을 떠난다.



모아나의 여정은 단순히 마을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다. 하와이는 폴리네시아 문화권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특징을 지녔다. 놀랍게도 폴리네시아 문화권은 태평양 전체에 걸쳐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섬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어 가장 넓은 지역에 퍼져있는 문화다. 모아나의 모험은 신화와 설화를 바탕으로 별을 보고 길을 찾고, 바람과 파도를 읽으며, 새들의 움직임을 통해 방향을 파악하는 전통적인 폴리네시안 항해술을 익히는 과정이다. 이 기술들은 그녀의 조상들이 태평양을 건너며 새로운 섬들을 찾을 때 사용했던 방법들로,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려고 했던 때가 언제던가? 나는 산호초를 빠져나가 대양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던가?


모아나는 또한 바다를 건너며 신적인 존재인 마우이와 교감하며 성장한다. 그녀가 대양을 건너며 마주하는 수많은 도전과 모험은 하와이의 자연친화적인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영화의 초반부에 마을사람들이 코코넛을 따먹고 우베를 만드는 모습 등은 폴리네시아 문명의 일상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하와이와 폴리네시안 문화의 자연 존중과 공생의 정신을 잘 담아내고 있다.


하와이를 여행하면서 나는 폴리네시안 사람들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야생닭들을 있는 그대로 보살피고, 벌레들 마저도 놓아서 보내주는 사람들을 보았다. 서핑을 하면서 파도에 반항하거나 길들이지 않고 자연의 일부인양 물아일체가 되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은 바다와 대지를 단순한 자원으로 보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체로 존중했다. 이러한 자연 존중의 마음은 오늘날에도 하와이의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오래 마을이 있었던 와이알루아 지역에 가면 조금 더 전통적인 느낌의 하와이를 만날 수 있다. 전통부족들과 함께 20세기 초반 플랜테이션을 위해 한국, 일본,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모여 살며 변형된 하와이의 문화 역시 느낄 수 있다. 집에서 서핑보드를 들고 나와 바다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하와이의 자연경관은 그저 아름다운 관광지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공간임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바다를 떠나 하와이에서 가장 하와이 같은 곳은 호오말루히아 식물원이었다. 그곳은 하와이의 다양한 식물들과 아름다운 경관이 어우러진 엽서 속 하와이, 지상낙원의 표지 모델 같은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자연이 주는 평화와 조화로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잘 보존되어 있기에 인위적이면서도 한없이 자연스러운 그곳에서 관광객들은 연신 사진을 찍어댔고, 지역민들은 돗자리를 피고 앉아 자연의 정취를 즐겼다.


한쪽면에서 보면 하와이는 엄청난 관광 공장이다. 하와이에 온 사람들은 휴양과 관광을 위해 여행사가 만들어 놓은 상업적 체험을 위해 기꺼이 돈을 내고 소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에 지친 이들이 경험을 소비하며 자유를 얻는 것을 비난할 순 없지만, 하와이라는 태평양 한가운데 섬까지 날아온 수고로움을 감내한 사람들이라면 조금은 더 하와이의 자연과 그곳의 문화에 순수하게 공감할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하와이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그곳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며 만들어낸 살아있는 유산이다. 내가 샥스코브에서 스노클링을 하며 느낀 몰입감, 모아나가 대양을 건너며 배운 해양기술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 호오말루히아 식물원에서 만난 평화와 조화는 모두 하와이가 주는 선물이었다.


모아나의 이야기는 하와이가 가지고 있는 자연친화적인 이미지와 폴리네시안 사람들의 자연 사랑을 상징하는 메시지이다. 하와이의 바다는 모험을 부르고, 그곳의 자연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하와이에서의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모아나를 떠올리며 나는 내 안에 잠자고 있었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모험이라는 열정에 다시 한번 불을 짚였다.


내가 하와이를 여행하며 느낀 모든 경험과 감정들은 모아나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만의 대양을 건너는 모험가들이다. 하와이에서의 스노클링과 모아나의 모험은 나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고, 자연과 하나 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와이는 나에게 자연의 경이로움을 선물해 주었고, 나는 그곳에서 잊고 있던 나, 찾고 싶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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