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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바 Dec 15. 2023

간단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법

    숟가락 끝에 간장을 콕 찍어 흰 죽 위에 떨어뜨린다. 간장에 든 참기름 냄새가 뜨거운 김을 타고 올라온다. 너무 많이 넣으면 짜고 너무 적게 넣으면 밍밍하다. 적당한 양의 간장을 적당한 양의 죽에 비벼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한 그릇의 간을 한 번에 맞춰버려도 안 된다. 한 번에 한 숟가락씩. 나는 흰 죽을 매 숟갈 그렇게 먹는다.

    내 나이 열다섯, 나는 흰 죽 한 그릇 먹고 자전거를 타고 40분 넘게 산길을 달려 학교에 갔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소화가 다 되어버려 주린 배를 붙잡고 점심을 기다렸을 테다.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아침 먹고 산길을 걷는다. 어린이집에서 매일 산으로 놀러 가는데, 산은 뒷동산 정도가 아니라 어른이 내가 가도 꽤 운동이 될 정도다. 그런 곳에 아이들을 보내면서 나는 아침을 덜렁 빵 한 조각 준다.

    우리집 냉동실을 열면 빵이 한가득이다. 나는 통밀빵이나 베이글을 먹고 아이들은 식빵이나 구름빵을 먹는다. 한동안 빵에 잼을 발라 먹었는데, 아침에는 혈당이 쉽게 올라간다기에 잼을 치우고 땅콩버터로 바꿨는데, 거기에 소량의 첨가물이 들어간다고 해서 ‘무첨가’를 찾아 식탁에 올려두었다. 100% 통밀빵을 먹여보려 했지만 아이들은 30%에 머물렀다. 내가 빵집이 아니라 반찬 가게를 했다면 잡곡밥에 반찬 세 가지를 줄 수 있었을까?



    느림보상점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해 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영화판에서 일하기도 했고, 영상 제작으로 돈 벌던 경험도 있어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떤 주제로 할지 고민했다. 빵집이니까 빵에 대한 영상을 만드는 게 당연해 보였다. 그렇게 해볼까 마음먹으려는 순간 신랄하게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바쁜데 일을 더 늘인다고? 아이들은 어쩌려고? 아이들은 관심이 필요해. 지금도 못 해주는 게 많잖아.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그건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니라, 내 안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내게 남은 한 조각 파이를 어떻게 잘라야 할지 고민한다. 나, 남편, 아이들 모두와 함께 나눠야 한다.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 내가 영상제작을 한다면 거기에 필요한 시간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서 가져와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게로 복귀하며 일이 많아진 참이었다. 일도 하고 아이들도 챙길 수 있을까, 그건 내 욕심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던 차에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영상의 주제를 ‘교육’으로 하면 어떨까, 기발한 생각처럼 보였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내가 다닌 학교를 떠올리면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다. 나는 내가 받은 교육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학교 교육의 목적은 일본 제국의 백성을 길러내는 일이었고, 독재 정권 때는 군인 양성, 그리고 지금은 돈 버는 자원으로 만드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듣거나, 옛날과 지금의 학교가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말 같은 것을 들으면, 아이들이 나와 같은 교육을 받아서 인생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 내 학창 시절이 그런 것처럼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을’ 날들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 유창하게 말을 할 때까지 몇 년 간 교육에 관한 책과 영상을 쓸어 모았다. 대안교육이랄지 새로운 공동체랄지 많이도 찾아 헤맸다. 학교를 보내지 않겠다고 한 적도 있었지 아마.

    내가 ‘교육’을 주제로 한 유튜브를 하겠다 하니 주변에서 우려했다. 빵집과 교육이라니, 창의성은 낯선 것의 조합에서 나온다지만 아무래도 억지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나는 아이의 교육에 적극 참여하는 훌륭한 부모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고 그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느림보는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일터였기 때문이다.

    나는 늘 가게방(가게에서 주거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 있는 점포를 원했다. 출퇴근 시간이 없고 월세를 한 군데만 내도 되어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그러다 지내던 집의 계약이 끝나서 빵집 한편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옷 몇 벌만 챙겨 들어갔고 네 식구가 구석 한편에 만든 삐걱대는 평상 위에서 서로 다리를 걸치고 잤다. 병기는 새벽에 평상에서 일어나서 주방으로 출근했다. 겨울 새벽에 일어나 덜덜 떨며 얼어버린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되고, 갓 구운 빵을 아침으로 먹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우리가 뭘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볼 수 있었다. 가끔 새벽에 병기가 떨어뜨린 철판 소리에 깜짝 놀라 깨거나, 퇴근 후에도 할 일이 눈에 들어와 일을 멈추지 못하곤 했지만, 대체로 아주 만족스러웠다. 일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일이 되었다. 가정과 일 모두 잘 해내고 싶어 하는 내게 아주 잘 어울리는 형태였다.

    뒤늦게 해 뜨고 일어난 아이들은 아빠가 무얼 하나 구경하다가 빵 반죽 하나를 얻어와 아침 먹는 식탁에서 조물락 댔다. 한날은 첫째가 식빵을 만들었다며 내게 보여줬는데 그 모양이 병기가 만든 것과 똑같았고 크기만 조금 작은 미니 식빵 같았다. 병기는 가르쳐준 적이 없다고 했다.


    집과 가게가 떨어져 있을 때 병기가 가게로 출근하면 나는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혼자 이 아이들(어린이집 가기 싫어하는)을 챙겨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을 생각하면 아이들을 깨우기 10분 전부터 온몸이 뻣뻣해진다. 그러면서도 나 혼자이기 때문에 더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아이들을 챙길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내가 힘들어도 달래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렇게 느끼는 거다. 병기가 옆에 있으면 나는 곧잘 무너져 버리는 걸 보면, 아이들이 길 가다 넘어진 후 엄마랑 눈이 마주치면 크게 울어대는 것과 같은 심리인 듯하다.

    나는 아이와 놀아주는 일이 늘 어려웠다. 배운 적이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부랴부랴 책을 통해 갓난아기와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지 겨우 익히고 나면 아이는 그새 커버렸다. 그럼 나는 2살 아기와 어떻게 놀아주는지 배우고, 아이는 다시 커버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됐다. 3살 다르고 4살 다르고 4살 반 달랐다. 어릴 때는 안아 들고 허공에 던지거나 입술로 배를 간질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아이들이 자랄수록 고차원의 것을 요구했고, 나는 그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놀이백과’에 있는 걸 해 보기로 했다. 아이들을 이불 위에 올려서 이불을 흔들어주는 것 같은 놀이는 내가 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먼지 알러지가 있었고 금세 지쳤다. 만들기는 좀처럼 흥미가 일지 않았고 물감 놀이는 치울 생각에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인터넷을 보면 다른 엄마들은 꽤나 열성적이었다. 모두 엄마놀이계의 프로 같았다. 나는 그럴 욕심도 내지 못했는데,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 놀이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고, 마무리하는 대신, 나는 못 다 읽은 책을 펼치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혼자 걷게 될 즈음 나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를 만들어내는 대신 아이들을 내 일에 불러들였다. 내가 요리를 하고 싶으면 재료 중 하나를 던져주고 조리도구들은 원하는 대로 가지고 가서 사용하라고 했다. 나무를 만질 때면 조그만 망치(진짜 망치)를 줬고, 그림을 그리면 종이를 한 장을 찢어 색연필과 함께 “너도 해 봐.” 하며 건네주었다. 아이들은 손에 쥔 도구들을 만지고 두드려보고 던져보다가, 슬쩍 엄마가 무얼 하는지 본다. 그리고 따라 한다.

    놀면서 배운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가까이서 보게 된다. 아이들은 내가 던져준 도구들을 쳐다보면서 ‘이게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나요?’라고 묻지 않는다.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내가 무엇을 가르쳐 줄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내가 하는 걸 한번 해보고 싶어 한다. 배우고 싶어 한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일했고 아이들은 놀았다. 두 팔 너비 만한 간판에 색칠하기, 손님에게 구름빵이 어떤 맛인지 설명하기, 오신 손님께 홍보물 나눠 드리기.. 아이들은 이 일들을 좋아했다.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칭얼대면 나는 일거리를 건네주었다.



    매주 일요일, 아이들은 병기와 프렌치토스트를 굽는다. 전날 계란물에 담가 둔 식빵을 냉장고에서 꺼내면 아이들이 차례대로 의자를 밟고 올라와 프라이팬 앞에 선다. 가르칠 때 병기는 명령조로 말하곤 했다. “똑바로 잡아.” “올라와.” “뒤집어.” “꺼내.”

    그러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춘다. 그의 말과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한다. 명령조의 말이 아이들의 자율성을 짓밟고 순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말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하지 말라고 말할까 하다 삼키고, 말할까 하다가 삼킨다. 하루는 이 이야기를 아는 선생님께 했더니 선생님이 내게 물으셨다.

    “명령하면 안 되나요?”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안 되는 건 아닌데요. 그냥.. 제가 불편한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했다.

    “아이들이 싫어하나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병기의 말에 두려워하거나 긴장하는 내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려운 과제에 집중할 때 짧은 명령조의 말이 도움이 되는 듯 보였다.

    “명령하는 사람도 만나봐야지요. 그게 싫다면 아이들은 거기에 저항하는 방법을 배울 거예요.”

    아이들은 성공적으로 프렌치토스트를 구워냈고 행복해했다.


    나는 부정 편력이 있는 뇌 구조를 갖고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속에서 부정적인 부분에 크게 반응한다. 아마 자라오는 동안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조그만 자극에도 문 위에 달린 사이렌이 울리고 동시에 모든 문과 창문이 자동으로 척척 닫히고 철문까지 2중으로 내려가는 시스템이다.

유년시절 학교 생활이 형편없었다고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 내가 좋은 것들은 흘려보내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사이렌이 울린 순간들)만 끌어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을까? 무엇을 교육하려고 하는 걸까?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고 그것이 내 목을 조르기 시작하면, 나는 거기에 힘 보태어 같이 조르지 않도록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아이들을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지 않은 것을 찾는다. 대체로 나는 ‘나를 위한’ 것을 선택한다.

    나는 나를 위해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으로 굴라는 말이 아니며, 이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거기다 정말 쉽지 않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일을 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원(시간∙돈∙에너지)을 확보해야 한다.

    한번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낸 적이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 울어도 될까 멈칫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정말 울고 싶었고 그냥 울어버렸다. 아이들이 불안해할 텐데 생각할 쯤에 둘째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나를 보고 있었다. 망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은지 한참 뒤, 둘째와 내가 긴 벤치에 앉아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린 그림을 오려 붙이다 말고 뜬금없이 내게 말했다.

    “달래주는 게 중요해.”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물었다.

    “울면 달래줘야 돼. 엄마도 엄청 크게 운 적 있잖아. 그리고 아빠랑 서로 안고 달래줬잖아.”


        나비가 날면 우리는 본다.

        나뭇잎이 돋고 푸르러지고 붉어지고 떨어지면

        우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본다.

        그리고 알게 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아침으로 어떤 이는 빵을 먹고, 어떤 이는 밥을 먹고, 어떤 이는 먹지 않는다. 우리는 전날 저녁을 일찍 먹으니 아침이 되면 배가 고프고, 아이들은 이따 산을 올라야 하니 아침을 먹는다. 완벽하게 좋은 것을 주는 건 어렵고, 안 좋은 것을 주지 않는 방법이 있다. 영양에 관한 책을 읽고 삼삼한 피클도 만들어본다(피클을 만든 후 아이들이 채소를 끊임없이 먹는다!). 이 과정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이지만 매일 누군가의 끼니를 챙기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삶과 일을 연결시켜 보기로 했다. 매일 아침 가족들과 먹는 음식을 메뉴로 만들면 어떨까. 빵도 그랬다. 경주 산골에 살 때 우리 먹으려고 구운 것을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었는데, 구매하고 싶다는 요청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알음알음 팔기 시작했었다. 내가 먹는 땅콩버터, 아이들이 먹는 저염저당 피클, 이런 것들을 만드는 김에 많이 만들면 우리도 먹고 필요한 분들에게 나눌 수도 있다. 가게와 가게방처럼, 일과 삶은 그렇게 연결된다.


    손쉽게 아침 입맛을 돋워주는 애피타이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덜 깬 눈을 비비며 거실로 걸어 나올 때, 내 두 팔을 활짝 펼치고, 꽉 끌어안고, “보고 싶었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나의 포옹이 혈당을 낮춰주고 부족한 영양소를 채워주진 않겠지만 아이가 씩씩하게 산을 오르는데 한 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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