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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화 Jul 07. 2018

그렇게 나는 베를린으로 떠났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라는 키에르 케고르의 말처럼 우리는 우연한 선택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경험을 종종 한다. 인생에 단 한번뿐일 수도 있는 외국생활을 결정하는 데 좀 더 드라마틱한 전개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베를린의 한 카페에 앉아 '독일워킹홀리데이'라는 단어를 써내려가던 그날의 내가 그랬다. 


2014년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유럽여행의 마지막 도시는 베를린이었다. 회색빛, 분단, 히틀러, 무뚝뚝이라는 단어로만 채워져 있던 베를린을 찾은 건 순전히 같은 대학 후배였던 H를 보기 위해서였다. 베를린은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9개국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독일 여행책자에서도 베를린은 2박 3일이면 충분한 코스정도로만 표기되어 있었다, H가 아니었다면 ‘지루하다’거나 ‘날씨 때문에 우울하다’는 평을 무릅쓰고라도 갈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바쁜 여행 일정으로 당시 나는 꽤 지쳐있었다. 여행에 회의감이 들 때쯤 도착한 베를린은 마치 요람 같았다. 불규칙하면서도 잔잔한 흔들림에 스르륵 눈을 감는 아이처럼 며칠간은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쯤이면 지쳐있을 나를 상상하며 베를린 일정을 한 달로 잡아두었던 나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천장 아래에서 꿈벅꿈벅 지나간 시간들을 정리하고 잃어버린 여유를 되찾으니 그제야 베를린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채 더위가 가시지 않은 8월말의 베를린은 회색도시라는 불명예를 벗어내기 충분할 정도로 나무와 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넓게 트인 공원과 소소한 카페에서는 삶의 여유가 묻어났다. 유럽의 수많은 관광도시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일상이 매력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숙소에서 영화 ‘비포선셋(before sunset)’을 다시 보는데 이전에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던 여주인공의 대사가 귀에 꽂혔다. 


비포선셋(Before Sunset, 2004)


“도시는 잿빛이었지만 내 마음은 맑아지더라. TV는 못 알아듣고, 살 것도, 광고도 없으니 오직 글 쓰고 사색을 할 수밖에 없었어. 소비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니 자유로워지더라고. 그냥 그대로가 너무 평온했어. 처음엔 지루했지만 곧 마음이 충만해졌어.” 


여행마다 성격이 다르겠지만 나는 짐을 덜어내는 편을 선택했고 의식적으로라도 소비를 피했었다. 평소에도 소비욕이나 물욕이 거의 없는 나에게 베를린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소유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자유로움, 그렇게 나는 TV도, 광고도, 인터넷도 없는 이곳에서 덜어내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럼 인생의 무게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워킹홀리데이’에 대해 알아본 건 그로부터 일주일은 더 지나서였다. H에게 이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속마음을 내비치니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를 추천해주었다. 호주워킹홀리데이야 워낙 유명하다지만 독일은 금시초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은 채 여행 동안 잊고 지내던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독일워킹홀리데이’를 검색하니 비자발급, 보험, 어학준비 등 관련 정보가 눈앞에 펼쳐졌다. 비자를 발급받는 일도 생각보다 간단했다. 수첩에 필기를 해가며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을 거두고 카페에 자리한 사람들을 향해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낯선 풍경 속에서 보낼 미래의 평범한 일상을 떠올렸다.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듯 어렴풋하던 베를린에서의 삶이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유럽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짐을 풀지 않았다. 베를린으로 가지 말아야할 수많은 이유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 것 같아서, 가방을 열면 튀어나올 문제들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것이 두려워서, 방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캐리어를 이리 뛰어넘고 저리 치우며 한 달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정신을 차린 것은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오늘 내로 정리를 안 하면 캐리어를 통째로 빨아버리겠다는 으름장에 이제는 철이 지난, 구겨진 옷들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빈 캐리어를 장롱 위에 올려두고 나서야 책상에 앉아 연필을 꺼내 들었다. 


의식을 치르듯 연습장 한 가운데에 세로로 줄을 긋고 왼쪽에는 ‘가야만 하는 이유’, 오른쪽에는 ‘가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 적었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많았다. 대충 써도 다섯 개는 족히 넘었다. 막힘없이 술술 써내려가는 손이 야속할 정도였다. 결혼, 아빠의 반대, 돈 낭비, 경력 단절, 곧 서른. 나열된 단어 사이로 직장도 없고 경력이 단절된, 그런데 돈도 없는 30대 백수의 모습이 보였다. 


문제는 가야만 하는 이유였다. 사실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후부터는 굳이 가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화살표를 죽 긋고는 ‘후회’라고 적었다. 베를린을 포기한다면 인생을 살면서 무수히 많은 벽에 다다를 때마다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며 살아갈 것이 뻔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가장 처음 해결했어야 했지만 마지막까지 미뤄 두었던 문제, 가족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아빠의 반대가 심했다. 딸 자랑하는 낙으로 살던 아빠는 나의 대학진학 이후로 뭐하나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없었다. 결혼을 하고도 남을 나이에 결혼은커녕 직장을 그만두고 외국생활을 한다고 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늘 그렇듯 공항에 캐리어 하나 내려놓고 가버리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면서 떠나는 건 나인데 남겨진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빠를 삼키지 못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한 고민의 과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행기는 단 몇 분의 지체도 없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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