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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화 Aug 04. 2018

베를린 일상-일요일엔 공원으로!

Sonntag im MauerPark

여행을 하다 보면, 특히 유럽에서는 유러피언의 여유로운 일상에 녹아들고 싶을 때가 있다. 여기서 여행객으로서 사진을 찍을 것이 아니라 나도 저 속으로 들어가 기꺼이 피사체가 되고 싶어 진다. 베를린에서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나도 완벽하게 그들의 풍경에 흡수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일주일에 단 하루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베를린에서는 부러 찾아 나서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벼룩시장을 만날 수 있고, 공원에서의 그릴이 가능하며, 어디서든 수준 높은 버스킹 공연을 볼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를 한 장소에서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마우어파크이다. 잔디밭에서는 밴드 공연에 맞추어 자유롭게 춤추는 사람들이 있고 원형무대에서는 가라오케라 불리는 공개 노래자랑대회가 열린다. 베를린 최대의 벼룩시장에서는 빈티지하면서도 보물 같은 아이템을 1유로에 구입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악 페스티벌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매주 일요일마다 펼쳐지는 것이다. 


Mauer(마우어)란 독일어로 '장벽'을 의미한다. 과거 장벽 주변의 안전지대였던 곳에 벽이 허물어진 뒤 공터로 남게 된 곳을 공원으로 조성해 마우어파크가 생겨났고, 이곳에 플리마켓이 들어서면서 베를린 최대의 벼룩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마우어파크 플리마켓에서는 '벼룩시장'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분위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 빈티지 소품, 엔틱가구, 예술품부터 낡았지만 누군가에게는 보물이 될 수 있는 아이템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굳이 사지 않아도 그 분위기만으로도 들뜨고 즐거워진다. 마우어파크 플리마켓에서는 누구나 셀러가 될 수 있다. 베를린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우어파크에 셀러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참석하려는 날짜의 일주일 전에는 직접 플리마켓 인포센터로 찾아가 신청을 해야 한다. 개인 셀러는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신청이 가능하지만 일찍 줄을 서지 않으면 자리를 배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우리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등록비용은 32€로 지붕이 있는 3m 길이의 부스와 테이블이 포함된 가격이며 예약 시 현장에서 20€를 선결제를 해야 했다. 나머지 12€는 플리마켓 당일 직접 부스로 찾아와서 수금을 해가는 시스템이었다. 예약을 제대로 마치면 테이블 번호와 날짜가 적혀있는 예약증을 발급해 주는데 플리마켓 당일 8시까지 방문해서 출석체크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9시 넘어서 설렁설렁 도착한 우리는 번호를 세 번이나 교체받아서 간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리는 미리 마우어파크에서 판매할 공책과 어린이용 한복을 한국에서 가져왔었는데, 실제로 공책의 소득이 꽤 좋았다. 베를린에서는 디자인된 팬시 제품들이 비싸게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에 플리마켓에서 3~4유로에만 판매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휘수의 예상 덕분이었다. 오히려 대박을 칠 것이라 생각했던 어린이 한복은 한 벌도 팔지 못했다. 무조건 싸게 사려는 벼룩시장의 특성상 30유로 이상인 물품은 마켓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친구들과 셀러로 참여한 마우어파크 플리마켓


장기 여행자들이 어느 시점 이상이 되면 '여행의 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봐왔다. 

장기여행의 장점은 어쩌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짐을 덜어낼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쓸데없는 집착일 수도, 각자가 짊어진 인생의 무게일 수도 있지만 짐을 덜어내면서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장기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마우어파크 플리마켓은 장기 여행자들이 짐을 내려놓기 아주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리마켓을 어느 정도 둘러보았다면, 혹은 판매를 일찍 끝마쳤다면 먹거리 부스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공원 곳곳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보러 갈 차례이다. 자리를 잘 잡으면 잔디에 누워 낮잠을 자면서, 맥주를 한잔하면서 수준급의 버스킹 공연을 즐길 수 있다. 



공연의 종류도 다양하다. 일단 연주가 시작되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자연스러운 축제의 현장이 된다. 앉아서 가볍게 리듬을 타는 사람도 있고 드럼 앞으로 나와 자유롭게 춤을 추는 사람도 있다. 조용히 포크송을 부르다 자리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기타를 쳐주는 엄마의 모습이 영화처럼 펼쳐지고, 좋아서 하는 사람 특유의 반칙과도 같은 눈빛도 볼 수 있다. 

이 속에서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누구인지, 돌아가야 할 날이 언제인지, 모든 걸 잊은 채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할 수 있다.



플리마켓과 공연이 전부라면 굳이 마우어파크가 아니어도 된다. 마우어파크의 마지막은 오후 3시에 원형무대에서 열리는 가라오케(Karaoke)다. 농구대 건너편 원형무대에서 매주 일요일 가라오케라 불리는 공개 노래자랑대회가 열린다. 

홈페이지에서 사전 신청을 받기도 하는데 신청자가 없을 경우 즉흥적으로 하고 싶은 사람이 손을 들면 사회자가 마이크를 넘겨준다. 팝송이나 독일 노래는 웬만하면 다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본 가라오케 공연 중 단연 최고는 타이타닉 OST인 'My heart will go on'의 떼창이었다. 베를린에서 떼창을 볼 줄이야. 후렴구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더니 마지막에는 기립박수까지 터져 나왔다. 노래 실력과 상관없이 함께 부르며 웃을 수 있는 분위기에 한국 콘서트장에 온 기분마저 들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일요일만 되면 블랭킷 하나, 맥주 한 병 들고 찾았던 마우어파크. 그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누워있으면 이대로 베를린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한 햇볕에 한껏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오늘 영화 제목은 뭐야?” 하고 물으면 “우리 빼고 다 행복해.”라고 말하는 휘수와 껄껄대며 잔디밭을 뒹굴던 그 순간만큼은 우리도 그곳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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