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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Apr 03. 2024

마흔두번째 길. 사건의 재구성

유전자가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책장을 인쇄하는 데 쓰인 특정한 활자판이
인쇄 과정의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일에서 나온 이야기는 뚜렷함을 잃는다. 이야기는 A에서 B로 B에서 C로 맥락으로 이어지면서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도 아닌 희미한 가상이 된다. 원래 어떤 뚜렷한 결과에서 다음 일을 시도할 때,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희미한 이야기가 된다. 그런 시도들이 다음 결과를 확실하게 맺어야 일어날 수 있는 미래는 확실한 자리에 확실한 내용으로 나타나면서 과거가 된다.

일들이 이렇게 진행되면서 그 진행 과정과 평가라는 정보 또한 남아서 진행에서 한 발 물러난 이야기가 되는데, 뚜렷한 결과가 아닌 희미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남겨진 이야기들이 다시 뚜렷한 결과에 포함되려면, 바로 그 이야기와 관련된 일을 기다리면서 다시 쓰이기를 시도한다.


이와는 달리 동물들의 의식에서 주위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희미한 이야기와 뚜렷한 내용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의식은 뚜렷하게 재구성된 일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지금까지 주로 다뤄온 일차적인 이야기는 일어나는 일들에서 벗어나고 합쳐지면서, 실제적인 일의 진행에 맥락이라는 효과를 불러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말없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의식에서 재구성된 이야기는 말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처럼 의식의 이야기는 실재하는 환경을 감각의 언어로 재구성해서 들려준다. 감각은 경험할 수 없는 주변의 일을 경험할 수 있는 내용으로 대체하는 몸의 언어다.


감각하는 일의 기본 골격은 '저것은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저것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으면 말없는 이야기가 되지만, 저것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 꾸며서 적극적으로 말해야 이야기가 통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감각이 일시적인 환상이 아니라 쓸모 있는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꾸며내더라도 그럴듯하게 반복되어한다는 것이다.

감각의 '이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건을 재구성할 때, 가능한 모든 증거를 수집하려 한다. 감각이 수집할 수 있는 증거는 닿을 수 없는 저것과 그나마 가까운 증거다. 감각하는 일에서는 저것과 간접적으로 연결된 일이 남긴 정보가 활용된다.


빛과 만난 일의 정보는 빛이 없는 일의 정보와 대비된다. 빛과 만난 정보는 진동과 만난 일의 정보와 대비된다. 빛의 짧은 파장과 만난 일의 정보는 빛의 긴 파장과 만난 일의 정보와 대비된다. 이런 환경과 마주친 정보의 대비는 말없는 이야기의 차원에서 희미하게 시도되면서 새로운 내용을 발생시키고 쌓아간다. 그리고 이 새로운 내용들(이것)이 저것에 대한 관심과 만나면서, '저것은 이것이다'라는 현재의 이야기를 꾸며내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쓰인다. 감각의 '이것'은 이런 방식으로 '저것'을 대체할 있는 언어의 자격을 얻는다.


간접적인 언어를 쓰기 위해서는 배우고 익혀서 습관화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감각수용체는 저것과 간접적으로 다시 연결되었음을 알린다. 신경전달은 즉각적으로 여러 신호들을 모은다. 신호들의 패턴에 따라 가장 가까운 이것으로 번역된다. 번역된 이것들은 함께 거시적인 환경재구성하는 일을 시도한다. 과정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의 진행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를 익히듯이 연습을 통해 반복될 가능성을 높여가야 한다. 그렇지만 감각기관은 이런 감각확고하게 일어나도록 준비한 결과이지 감각의 기초인 것은 아니다. 하는 이야기의 기초에는 세포들이 환경과 만나는 생존 활동과 그 활동에서 나오고 다시 쓰이는 말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경험들이 쌓이면서 새롭게 제기되는 말없는 질문과 대답의 시도들이 있다. 




우리는 흔히 유전자가 단백질 합성 과정을 지시한다고 보고, 유전자에게 감독의 기능을 맡긴다... 이 시각의 문제는 단백질 합성에 대한 공로를, 나아가 세포 속에서 벌어지는 전반적인 일들에 대한 공로를 유전자에게만 너무 많이 부여한다는 점이다. 유전자가 단백질 합성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전구 단백질을 만드는 간접적 주형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물론 주형 기능은 핵심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전자가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책장을 인쇄하는 데 쓰인 특정한 활자판이 인쇄 과정의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유전자 감독 가설의 대안은 내가 ‘세포 감독 가설’이라고 이름 붙인 시각이다. 이 시각에서 유전자는 생화학 분자들로 이루어진 앙상블의 한 구성원이고,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곧 세포다. 감독 기능은 세포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지, 세포의 특정 부분으로 국소화되지 않는다. 유전자는 세포가 활용하는 물질적 자원처럼 기능한다. 이 시각에 따르면, 단백질 합성의 매 단계를 안내하는 역할은 세포 차원에 있다. 특히 단백질 합성에서 어떤 시점에 어떤 유전자가 관여하는가 하는 ‘결정’을 유전자가 아니라 세포가 내린다는 점이 중요하다. 달리 말해, 유전자 조절은 세포 전체가 수행하는 활동이다.*


DNA는 특정한 결과를 의도하는 부호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유전자는 맥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 만약 DNA 분절 하나가 어떤 맥락에서는 신경호르몬을 만드는 데 사용되고 또 다른 맥락에서는 칼슘을 조절하는 아미노산 연쇄를 만든다면, 우리는 이 DNA 서열을 신경호르몬에 대한 ‘유전자’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미노산 연쇄에 대한 유전자로 생각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둘 다에 대한 것일까? (두 산물 모두 만들어지지 않는 맥락도 존재하므로) 둘 다에 대한 유전자가 아닌 것일까? 현재 나와 있는 데이터에 따르면, 때로는 한 RNA 구간이 수백가지 산물을 만들어내도록 편집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전자란 한 가지 산물을 구체적으로 지정하는 뉴클레오타이드 염기들의 언제나 변함없이 유지되는 서열이라고 보는 전통적 관념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 리처드 C. 프랜시스, 김명남 옮김, <쉽게 쓴 후성유전학> 42~43쪽, 시공사, 2013.

** 데이비드 무어, 정지인 옮김,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73~74쪽, 아몬드, 2023.

*** (대문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범죄의 재구성>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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