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졸음이 온다. 졸음을 내쫓으려고 카페인을 섭취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몇 모금을 마시고 나면 빨라지는 심장박동. 노동하다 짬이 나 생산적인 딴짓을 해보려 할 때, 그놈이 내 다리 사이를 스치는 걸 느낀다. '검은 고양이'가 왔다. '검은 고양이', 그것은 내가 불안이라는 놈에게 붙인 일종의 닉네임 같은 것이다. 벽에 비친 그것의 그림자를 보고 그게 대단한 것이라 착각하며 떨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그저 검은 고양이 정도로 명명하려고 한다. 걔는 걔대로 나는 나대로 이 공간에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걔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을 밟기도 하고 나 또한 실수로 걔를 걷어차거나, 걔가 보기에 재수없는 눈빛을 보내버려서 걔의 성질을 돋궈버리거나, 그래서 발톱 공격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 뿐이다. 사실 걔는 나 따위에게 대단한 관심이 없다. 왜냐면 불안은 존재 자체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불안하기에 연약하며 불안은 불안하기에 공격적인 것 뿐이다. 불안을 다루는 법은 그것을 내쫒는 것이 아니라 공생하는 것이다. 불안의 감촉과 움직임을 느낄 수 밖에 없기에 그것을 수용한다. 수용하는 것은 흡수되어 먹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Let it be의 태도다. 폴 매카트니의 지혜로운 어머니 메리가 말씀하셨듯,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고양이와 친해지는 법은 일단 고양이를 내버려두는 것이다. 고양이를 존중해줄 때, 고양이도 내 존재를 긍정해준다. 그놈하고 나도 언젠가 친해질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그 놈을 쓰다듬을 수도 있다. 나는 심장이 뛰는구나, 내 불안은 이런 곡선으로 내 몸을 흘러다니는구나, 이러한 파동속에 들어 있다보면, 또 이러한 부정적 생각들이 불려오기 십상이구나, 그러면 나는 이놈을 회피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행동들을 하는구나, 주로 친한 친구를 들쑤시거나, 업무를 산발적으로 처리하거나, 인스타그램의 매끈한 여자들을 보거나 하면서 헐떡이는구나. 그러고 싶지 않다면, 나는 불안이라는 놈이 들어있는 그 방에서의 탈출을 시도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불안에게 내 방을 통째로 내 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불안과 내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내 영역을 지키면서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얄궃게도 불안은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행위를 하기 전에 오거나, 인생에서 의미있게 기억될 몇 안되는 시간을 앞뒀을 때 곧잘 방에 침입하곤 한다. 혹은 그 놈 대신 권태가 오기도 하는데, 불안은 나를 위험에 대비시키기 위해 예민스럽게 구는 알러지 반응이라면, 권태는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획득했을 때 그것을 잃게 될 상실감에 대비시키기 위한 반응으로써, 둘의 성격은 정 반대지만 둘 다 방어기제라는 면에서 같다. 불안이 오면, 인사해주자. 안녕, 검은 고양이.
아침에 마신 아메리카노와 카페인 증상, 카페인 증상이 불러온 불안한 감각이 이 글을 쓰게 했다. 불안아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