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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3. 2023

짐 : 인생의 무게

08






“배낭의 무게를 줄이는 것은 두려움을 버리는 과정이라고 그는 말했다.
한 사람이 지니고 다니는 물건들은 각각 부상, 불편함, 지루함, 공격 등 특정한 두려움을 표상한다.”

- 《온 트레일스》, 로버트 무어



교통, 숙박, 음식같은 것들에 신경을 덜 써도 되는 곳. 하지만 그만큼 머리를 아프게 했던 함정 같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배낭. 너무 가벼워서도, 너무 무거워서도 안 되는 존재.


배낭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라는 말은 순례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게 되는 말 중 하나였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순례길에서 배낭은 정말 중요한 물건일 수 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 몸뚱아리 하나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배낭에 들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순례자에게 배낭은 ‘모든 것’ 그 자체였다. 순례자를 나타내는 동상이나 그림, 사진에서도 모두가 배낭 혹은 어떤 짐을 메고 있었다.



고르고 골라 구입한 60리터 짜리의 커다란 배낭은 메고 다녀 본 적도 없었고 이렇게 긴 여행을 해본 적도 없었으니 어떤 노하우나 요령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이미 순례길에 다녀온 사람들의 조언들을 볼 때면 더욱 혼란스러웠다. 챙길 건 많은데 짐의 무게가 몸무게의 십 분의 일 정도여야 한다느니, 10킬로그램을 넘으면 안 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불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빼자고 했는데도 짐들을 주욱 깔아놓고 보니 온갖 물건들이 있었다. 카메라 삼각대, 맥가이버칼, 전자책, 블루투스 키보드, 러닝화 같은 것들까지 다 챙기고 났을 때 배낭은 거의 14킬로그램에 육박했다.


결국 순례길에서 처음 만나는 대도시인 팜플로나에서 정말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몇몇 짐을 한국으로 보냈다. 쉴 수 있는 시간에 우체국까지 가서 짐을 보내는 과정이 번거로웠지만 짐을 부치고 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인생의 무게를 덜어냈다는 묘한 뿌듯함 마저 느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12킬로그램의 짐이 남아 있었다. 한국에서 알아봤던 조언에 따르면 아직도 무거운 무게였지만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팀 수퍼 슬로우로 함께 했던 외국인 순례자들의 평균 배낭 무게는 15킬로그램이었다. 니코가 했던 말이 배낭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는 신경 꺼. 너가 챙기고 싶으면 챙기고, 버리고 싶으면 버려. 이건 숙제가 아니야.’



종종 아주 가벼운 짐만 가지고 걷거나 아예 짐이 거의 없는 상태로 걷는 순례자들을 보았다. 그들의 배낭은 어디로 갔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동키’라는 것이 있다. 배낭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거나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 경우에 사용하는 일종의 서비스였고 동키를 사용하면 더욱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동키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조랑말에 짐을 싣고 가던 옛 모습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와 지금은 택배처럼 자동차를 통해 다음 목적지까지 짐이 운반되는 것이다. 배낭은 여전히 무겁게 느껴졌지만 이 모든 길이 끝날 때까지 동키는 단 한 번도 이용하지 말아야겠다는 고집스럽고 수고로울 다짐을 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름대로의 논리적 근거도 있었다.


배낭은 인생의 무게라고 했다.

동키를 하면 내 배낭을 누군가가 대신 운반해준다.

내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다.


이 길의 끝까지 꼭 내 힘으로 짊어지고 가리라. 내 인생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리라. 오롯이 나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힘겹게 올라선 길에서까지 나약한 마음으로 걷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어깨와 등을 짓누르는 배낭이 하염없이 무겁게 느껴질 때면 욕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끊임없이 삼켜내고 끝까지 걷겠다는 오기 가득한 다짐을 한 셈이었다. 다짐이 지켜지든지 말든지 오후의 팜플로나는 예쁘고 한가로웠다.







그 날 밤, 알베르게의 삐걱거리는 침대에 드러누워 작은 성당에서 받은 종이 하나를 꺼내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The Beatitudes of the Pilgrim

행복하여라. 순례의 길이 눈을 열게 하여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것에 마음을 두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길을 명상할 때, 그 길이 수많은 이름들과 여명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진정한 길은 그것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배낭은 비어 있지만 마음은 풍요로운 느낌들과 벅찬 감동으로 가득해진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옆의 있는 것을 돌아보지 못하고 혼자서 백 걸음 앞서 나가는 것보다는 한 걸음 뒤로 가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훨씬 더 가치롭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순례자여. 당신이 길을 벗어나거나 빗나간 것에도 놀라워하는 그 모든 것에 감사할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행복하여라, 순례자여. 당신이 만약 진리를 찾고 있고, 그 길에서 생명을 만들며, 자신의 삶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결국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찾기 위한 것이라면.

행복하여라, 순례자여. 당신이 이 길에서 참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고, 서둘지 않고 충분히 머물면서 마음 속에 그 이미지를 잘 간직할 수 있다면.

순례자여, 이 길이 큰 침묵을 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침묵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대는 정녕 행복하여라!


The Way : Parable and reality
- ‘비유와 현실’의 길-

이 여정은 당신을 ‘순례자’로 만듭니다. 산티아고의 길은 단지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 걸어야 하는 하나의 길인 것만도 아니고, 또 어떤 보상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 까미노 데 산티아고(성 야고보 순례길)는 당신에게 하나의 ‘비유’이자, 동시에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진정 마음을 열어 이 길에서 당신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허용하고, 기꺼이 이 길의 순례자가 된다면, 이 길의 각 단계들은 (당신 삶의 이 특별한 시기 안에서) 당신 인생의 전체 여정을 내적, 외적으로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당신을 ‘단순함’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등짐이 가벼울수록 걸을 때의 부담이 덜어지는 체험으로부터 당신은 살아가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이 길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은 당신을 다른 사람들과 형제, 자매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설사 당신이 이 길을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곧 길동무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당신이 가진 것들을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기꺼이 그들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로하고 발에 물집이 잡히더라도 당신은 동 트기 전에 일어나 새벽 전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 하지만 계속 걸어야 하므로 당신은 적절히 쉬기도 해야 합니다. 이 길은 당신을 명상(관상)에로 이끌 것이며,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환영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 길은 당신을 내적 여정에로 초대하고, 소란한 것으로부터 멈추게 하며, 고요 속으로 부를 것입니다. 대자연과, 이 길에서 만날 동료들과, 당신 자신, 그리고 하느님께 경청하고, 감탄하고, 축복하도록 이 길은 당신을 부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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