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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3. 2023

일 :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07






“트레일이 주는 주된 기쁨 중 하나는 하이킹이 엄격히 제한된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매일 아침, 하이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다. 걷거나 그만두는 것이다.”

- 《온 트레일스》, 로버트 무어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4일 차에 접어들었다. 어느새 약 100킬로미터를 걸어왔다. 가야 할 길은 끝도 없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벌써 100킬로미터 가까이 걸어왔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걷는 매일의 끝에는 달콤한 휴식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20킬로미터, 혹은 30킬로미터가 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을 걷다가 어느새 문득 그날 묵게 될 알베르게 앞에 다다랐을 때의 묘한 기분이 있다. 여권과 크리덴시알을 꺼내고, 그곳의 도장을 찍고 지갑을 뒤적여 현금을 지불하는 일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배낭의 무게는 아직 무겁게 느껴졌고 간혹 무릎과 발가락이 시큰했지만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해야 할 일이라고는 크게 걷는 것, 먹는 것, 자는 것뿐이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곧 직업이 되는 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걷는 자’였다. 순례자, 도보 여행가, 하이커 같은 이름도 결국에는 ‘걷는 자’였다. 그저 걷고 또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는 것만이, 나아가 포르투갈의 최남단까지 도착하는 것만이 앞으로의 긴 시간 동안 내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로버트 무어가 말한 엄격히 제한된 경험이 주는 심리적 만족감은 생각보다 컸다.


빨래는 매일의 업무다





여행에서 가장 기본적인 게 무엇일까. 먹고, 자고, 이동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여행은 힘들어진다. 먹을 만한 것이 없거나, 마땅히 잘 만한 곳을 찾을 수 없거나, 목적지까지 이동할 교통편이 없다면 머릿속은 스트레스로 가득해질 것이다. 효율적인 동선을 고려해 음식, 숙박, 교통 이 모든 게 다 해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또한 하나의 여행이라면 이 여행은 지금껏 해왔던 다른 여행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순례길 위에서는 크게 고민할 것이 없었다. 순례자들이 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다. 표지판이든, 비석이든, 건물에 그려진 것이든, 길에 그려진 것이든 오로지 노란색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었다. 교통수단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두 다리로 걷기만 하면 되었다. 숙소 역시 각 마을마다 몇 군데씩 정해져 있는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에 머무르면 되었다(론세스바예스처럼 알베르게가 한 곳만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남은 건 음식. 길 위의 카페나 바에서 또르띠야, 샌드위치 같은 걸 사 먹거나 마트에서 식료품을 몇 가지 구매해 알베르게의 주방에서 조리해 먹으면 되었다. 애초에 20~30킬로미터를 걷고 나면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을 수 없었다.


《온 트레일스》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인생의 지형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런 표시도 없는 산속의 어지러운 자유보다 길의 구속을 선택할 것이다.”


길의 구속, 그리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매일 해야 할 일들을 더욱더 깊게 할 수 있게 된 건 그 아이러니한 자유 때문일까. 걸으면 걸을수록 신기한 여행이라 생각했다.


용서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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