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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2. 2023

말 : 부엔 까미노

05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처한 겁니다. 하루는 예전보다 느리게 지나가고,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서 갓 나온 아기처럼 말이죠. 갓난아기처럼 주위의 것들에 훨씬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지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과도 더욱 가까워지게 되지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신들이 베푸는 아주 작은 호의조차 몹시 기쁘게 받아들이죠. 마치 남은 생애 내내 그걸 기억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생장피에드포르의 끝을 알리는 아치형 통로를 빠져나오자 조금씩 산길이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첫날은 가장 힘든 날 중 하나로 손꼽힌다. 프랑스와 스페인 경계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는 27킬로미터라는 짧지 않은 거리였고 산까지 넘어야 하는 데다가 무거운 배낭에도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 운동을 많이 하거나 등산을 자주 다니던 사람이 아니라면 분명 쉽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힘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느꼈을 해방감 때문이리라. 그 감정은 나를 끊임없이 각성시켰다. 여기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없이 고무되었다.


출발한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생장피에드포르를 떠난 후 만나게 되는 첫 순례자 숙소(알베르게)인 오리손 산장에 도착했다. 그곳엔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산 중턱에 떡하니 자리 잡은 오리손 산장은 대략 7킬로미터를 걸어온 순례자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고, 첫날의 부담을 크게 느끼는 순례자들이 하룻밤을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이 길에는 나이가 지긋한 중장년층 순례자들도 많았기에 여기에서 첫날밤을 보낼 사람들도 꽤 있어 보였다. 크리덴시알을 꺼내 두 번째 도장을 찍고 온갖 외국어가 가득한 첫 방명록에 한글의 흔적도 남겨보았다. 낯설게 느껴지는 그 과정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눈앞에는 피레네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한가로움을 넘어선 평화로움이 거기 있었다. 낮게 깔린 구름들, 그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 줄기, 초록빛 들판 위를 수놓은 동물들, 은은하게 들려오는 맑은 종소리, 그리고 길과 순례자들. 잠시 환각에 빠진 듯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걷기 좋다는 9월답게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순례자들을 볼 수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홀로 걷는 순례길은 아니었지만 그 덕에 생각보다 빠르게 순례자처럼 행세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겠다고 했을 때 ‘산에 가거나 공원을 걸으면 되지’라던가, ‘그렇게 걷고 싶으면 우리나라도 좋은 곳 많은데 뭐 하러 거기까지 가냐’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순례길 위에서의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하게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만난 5명의 평균이 바로 당신이다’라는 말을 피부로 실감했으니까. 이 길에서는 내가 만나는 대다수가 전부 순례자들이었다. 실로 대단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루종일 만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무려 800킬로미터를 걸으러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나는 앞으로도 매일 새로운 순례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럴수록 점점 더 진하고, 더 깊게 이 길을 느끼며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무겁게만 느껴지던 순례자라는 이름에 금방 익숙해진 건 단순히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순례길의 상징인 가리비와 노란색 화살표를 마주하고, 크리덴시알에 도장을 찍고,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순례자들끼리 끊임없이 건네는 말 한마디는 빠른 속도로 나를 순례자로 느껴지게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들어 보았을 ‘좋은 길 되세요’라는 스페인어. 이 길의 끝까지 듣게 될 따뜻한 그 말.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아일랜드에서 온 노부부 톰과 크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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