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단단 Sep 02. 2023

때 : 떠나야 할 순간

03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가야 할 순간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제때 그곳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책 한 권은 나를 더욱더 길의 심연 속으로 빠지게 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하이커인 로버트 무어라는 사람이 쓴 《온 트레일스》라는 책이었다. 책 속에는 제목 그대로 트레일trail, 즉 ‘길’에 대한 ‘글’이 가득했다. 저자는 미국 동부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3200킬로미터를 걷고 수년간 아이슬란드에서 모로코까지 이어지는 탐험을 하며 길의 비밀을 찾아가는 여정을 책 한 권에 담아 놓았다.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참 많았지만 가장 마음을 울린 대목이 있었다.


“1971년, 인터뷰에서 기자가 그에게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묻자, 눈이 거의 안 보이게 된 92세 노인 매케이는 선문답처럼 단순하게 간추린 답을 내놓았다.


1. 걷기 위해,

2. 보기 위해,

3. 그리고 당신이 보는 것을 진정으로 보기 위해!”


앞으로의 길 위에서 나는 어떤 길을 걷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진정으로 보게 될까. 몇 달 전의 내가 떠올랐다. 차장님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을 때의 무거웠던 마음, 부모님께 퇴사했다고 통보했을 때의 죄송했던 마음, 앞으로의 미래가 두려워 이내 불안해졌던 마음. 그 모습들이 색이 바랜 구겨진 필름처럼 이어져 나타났다. 온갖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이 선택은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까. 책 한 권에 완전히 매혹되어 버린 채 한참이나 길을 앓았다.








1년간 이어질 세계여행의 첫 번째 여정은 800킬로미터에 이르는 스페인 북부의 산티아고 순례길로 결정되었다. 멋진 여행지에 가는 것보다는 멋진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그동안 해오던 일반적인 여행보다는 의미 있는 시간들이 나에게 많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길 위에서 조금은 더 성장하고 성숙해진 나를 보고 싶었다. 다른 좋은 여행지들도 많았지만 길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슴속에 먼저 품어졌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800킬로미터라는 긴 거리를 걸어서 완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지만 그 불가능성은 고스란히 가슴을 뛰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되어갔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하염없이 걸음을 옮기는 이 신비스러운 길에 대해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리워하게 되는 길이라 했다. 한 번 가겠다고 마음먹으면 언젠가는 가게 되는 길이라 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질리도록 걷기만 할 텐데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려다 놓는 것일까.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스페인식 이름 산티아고)가 걸었다는 길인 만큼,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순례길에 오른다고 한다. 하지만 ‘신에게 이끌려 와 나를 깨닫고 가는 길’이라는 누군가의 표현처럼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난다. 나 역시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어쩌면 나 또한 신에게 이끌려진 것일지도 모른다. 돈이 아닌 진짜 신 말이다. 누구나 자신이 믿는 것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 길은 자신이 믿고 있거나, 믿고 싶은 것에 귀 기울여 보게 되는 길이 아닐까. ‘기도란 결국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는 말처럼.


일종의 고행으로 보일 수도 있는 수백 킬로미터의 걷기를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자신만의 믿음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산티아고 순례길만큼 순수하고, 사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길은 없었다. 길을 걷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걷는 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까',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가 그려진 표지석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산티아고 대성당을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같은 것들. 많은 외국인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 길에 오르냐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아직 만나지도 않은 그들의 의문 가득한 눈동자를 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그려보았다. 내가 그 길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인지 그 길이 나에게 가까워져 오는 것인지 점점 분간이 되지 않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하면 보통 프랑스 남쪽의 작은 시골 마을 생 장 피에드 포르에서 시작해 야고보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스페인 서북부의 큰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향하는 800킬로미터의 ‘프랑스길’을 일컫는다. 800킬로미터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두 배에 달하는 거리인 데다가 족히 한 달을 넘게 걸어야 하는 거리다. 그 숫자의 무게가 더없이 무겁게 느껴졌음에도 무슨 자신감 때문인지 더 오래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온 트레일스』에 나온 3200킬로미터의 애팔래치아 트레일처럼 무한하게 펼쳐진 길의 심연 속으로 더 깊이, 더 깊게 빠지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때마침 순례길에도 여러 종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출발하는 600킬로미터의 '포르투갈길'이었다. 프랑스길의 높다란 산맥과 드넓은 평야 대신 포르투갈길에서는 대서양을 바라보며 해안선을 따라 걸을 수 있다고 했다. 한 번에 두 나라를 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처럼 보였고, 산티아고에 도착한 뒤 다시 출발해 리스본까지 거꾸로 걸어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마음이 굳어져버린 것은 리스본 너머 포르투갈 남부에 ‘로타 비센티나 트레일Rota Vicentina Trail’이라는 생소한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였다. 푸른 파도가 높은 절벽에 부서지며 황홀해 보이기까지 하는 해변은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결정은 끝났다. 귀신에 홀린 듯 1400킬로미터를 걸어보겠다는 호기롭고도 무모한 계획이 세워졌다.



로타 비센티나 트레일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하는 순간, 여행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라는 문장 속에서 지냈다. 생전 처음 떠나는 도보 여행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서로 뒤엉키며 점점 커져갔다. 기나긴 순례를 마친 뒤로는 유럽 대륙을 떠나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이집트를 여행하기로 했다. 이외에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다. 뒷일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모든 걸음이 끝나고 나면 나는 아마도 예전과는 꽤 많이 다른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자정을 넘긴 새벽에 인천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항공권을 구매했다. 포르투갈까지 걷겠다는 의지를 지켜내기 위해 걷는 일정에 맞춰 리스본에서 모로코 마라케시로 넘어가는 티켓까지 끊어 두었다.


길이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이전 03화 글 : 글 속에서 만난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