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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행복은 이런 건지도 모른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지금과는 다른 일을 하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
- 《행복의 지도》, 에릭 와이너
그날의 대화 이후로, 나는 한 글자로 된 단어 중 하나를 조금 더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바로 ‘길’이었다. 늘 발 밑에 존재하던 평범한 단어가 새롭게 보이게 된 것은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이었다. 나는 ‘직장인’이라는 길 위에 서 있었다. 그 새로운 길에 올라서기 전까지 십 수년간 ‘학생’이라는 길을 걸어왔다. 엄마의 손을 잡고 입학식을 했고 시간이 지나 어머니의 머리에 학사모를 씌워드리던 순간에 ‘배우는 삶’이었던 공식적인 학생 신분은 마침내 끝이 났다. 그동안 학생으로서의 기나긴 세월은 어디로 흘러가기 위한 것이었을까? 28년에 가까운 삶은 어디로 흘러가기 위한 것이었을까?
학생의 길이 끝나갈 무렵은 취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발버둥 쳐봐도 못내 전부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바야흐로 취업난의 시대였고 취업이 되지 않으면 인생이 불행에 빠질 거라 지레짐작했다. 운이 따라준 것인지 졸업식을 마치고 고작 2주 정도가 막 지났을 무렵, 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직장인이라는 새로운 길 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추위가 아직 다 물러나지 않은 초겨울의 끝자락, 수많은 빌딩들 사이에 상기된 표정의 어색한 내가 서 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쌩쌩 바람소리를 내며 달리는 자동차들, 수없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빌딩의 유리문,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양한 목소리들. 긴장감을 놓지 못한 채 낯선 순간들을 온몸으로 느끼던 순간이었다. 지금을 위해 좋았든 나빴든 그동안의 모든 시간들을 달려왔다고 생각했을까. 첫 출근을 기념하고 싶어 멋쩍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여서일까, 아니면 지나간 길 위로 나도 모르는 미련이 남아 있었던 걸까. 회사에 덜컥 합격했을 때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도 이유 모를 씁쓸한 뒷맛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그 잔맛은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이었던 것인지 결국 회사는 1년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유는 일견 복잡한 듯해도 실은 단순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즈음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던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이 주는 느낌, 그것이 좋을 때 그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거든. 자기한테 맞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거든.”
고백하건대 나는 나에게 맞는 삶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제야 내 인생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가슴속에서 곪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이 아이러니하게도 모두의 축하를 받던 첫 직장이었던 것이다. 열심히 해보려 하면 ‘일 벌리지 말라’는 조직, 정치질이 난무하는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문화, 의미와 보람을 거의 찾을 수 없는 기계적인 시간, 안주하려고만 하는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 ‘더 다녀봐야 회사 입장에서도 손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마음은 더욱 강하게 일렁였다. 스무 살 때부터 버킷 리스트였던 자전거 무전여행을 8년이 지난 스물여덟 살이 되어서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무렵엔 일렁이던 마음이 끝내 요동치고 말았다. 나는 불행한 안정보다는 가슴 뛰는 불안을 선택할 운명이었던 것일까.
대학생으로서의 여름 방학을 처음 맞이한 스무 살 여름, 우연치 않게 한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20일 동안 자전거 무전여행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감흥 없는 나날을 보내던 때 느닷없이 나타난 ‘자전거 무전여행’이라는 일곱 글자. 무인도 땡볕에서 갖은 고생 끝에 따 먹은 코코넛을 본 느낌이었달까. 가본 적도 없고, 먹어 본 적도 없고, 뭐 하러 그 고생하나 싶으면서도 ‘한 번쯤 그래봐도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그런 단어 같았달까. 모험이나 도전 같은 거창한 단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이십 대 청춘의 한 페이지로 남겨둘 추억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자전거 무전여행은 나의 첫 버킷 리스트가 되었다.
녀석과 친분이 깊진 않았던 터라 주변 친구들을 수소문해 그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취했다. 며칠 뒤 그는 연락이 민망해질 만큼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 편지에는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온갖 정보와 팁, 노하우가 가득했다. 그때는 자전거 국토종주길이라는 개념도 없을 때여서 녀석은 정말 문자 그대로 한반도 골목골목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 셈이었다. 스마트폰이 막 대중화되던 시점이다 보니 대형 포털의 지도 앱 같은 건 상상도 못 했을 때였다. 그는 지도가 가장 중요하다며 한국관광공사나 각 지역의 공공기관에서 지도를 꼭 챙기라며 강조하기도 했었다. 그토록 정성스러운 메일을 받아 놓고도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메일을 기억 저 편에 묻은 채로 살았다.
그 후 수년간 평범한 길을 걸어왔고 직장인으로서의 길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비범한 삶을 살 수도 없었고 그렇게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지만 회사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던 그 시절엔 무언가 다른 길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친구의 자전거 무전여행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우연치 않게 유튜브에서 영상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도전의 아이콘’, ‘꿈을 이루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현호라는 분의 강연이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자전거 무전여행 중 제가 남녀노소 100명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중 절반 이상 넘는 분들이 저에게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 말이 뭐냐면, ‘나도 너희처럼 자전거 여행 하고 싶었었는데, 나도 어렸을 때 무전여행 해보고 싶었었는데’. 이때 제가 깨달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당장 해야겠다. 전역하고 해야지, 돈 벌어서 해야지, 결혼하고 해야지, 애 낳고 해야지 하다 보면 이미 꿈이 멀어져 있다는 걸 저는 이때 경험으로 깨달았어요. 꿈은 누구나 꾸지만 행동은 누구나 하지 않는다는 걸 이때 알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자고 생각했어요.”
한동안 멍한 채로 앉아 있었다. 갑자기 아득한 기억 너머에서 동창 녀석의 메일이 툭 튀어나왔다. 허겁지겁 메일함을 뒤적여보니 메일함 끝에는 그가 보냈던 메일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8년이 지나 그 메일을 다시 읽게 됐을 때의 기분은 한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해보고 싶은 것들을 영영 놓치고 살게 될 것만 같아 소름이 끼쳤다.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이해관계나 목적 없이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는 해 본 게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만족스럽지 않은 회사생활,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버킷 리스트,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강연. 늦었지만 그간의 길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퇴사를 한다면 앞으로의 미래는 불확실해지겠지만 지금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은 확실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회사를 그만두었다.
첫 여정은 인천에서 부산까지 633킬로미터를 달리는 자전거 국토종주였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처음 보는 어색한 나만의 길 위에 서게 되었다. 늦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