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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1. 2023

그녀를 향해 걸었던 1400킬로미터의 에움길

프롤로그






언젠가 아버지와 한 글자로 된 단어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먼 옛날 ‘빛’이 태어났다. 뒤이어 '땅'이 생겨났다. ‘흙’이 쌓이고 ‘물’이 흘렀다. '산'이 솟아나고 '숲'이 우거졌다. 대지는 ‘풀’로 뒤덮였고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났다. 어느 날에는 ‘불’이 났다가 어느 날에는 ‘비’가 내렸다. '해‘가 뜨면 ‘낮’이 되었고 '달'이 뜨면 ‘밤’이 되었다. 사람은 '눈', ‘코’, '입', '귀'를 통해 그 모든 것들을 감각한다. ‘몸’은 ‘뇌’, ‘뼈’, ‘피’, ‘살’로 이루어져 있다. ‘손’과 ‘발’은 매 순간 바쁘게 움직인다. 매일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집'에서 생활한다. 우리는 ‘부’와 ‘모’가 있고 ‘벗’이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연’을 맺는다. 각자 주어진 '일'을 하며 '돈'을 번다. 그러다가 '잠'에 들고, 가끔씩 '꿈'을 꾼다. 이것이 ‘삶’의 모습이다.


생각에 잠겼다. 이들의 이름은 어째서 한 글자가 된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끝에서 알게 된 한 가지는 누구도 하나의 글자로 된 것들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누가 한 글자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신’조차도 한 글자의 세상에서 산다.


하나의 글자로 된 단어들은 대부분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동시에 그 존재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그들을 생각하노라면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드는 것들이었다. 구태여 그것들을 두 글자 이상으로 부르지 않게 된 것은 선조들의 오래된 지혜같은 건 아니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 1400킬로미터. 72일간 하염없이 걸었던 그 ‘길’은 나에게 진정한 한 글자의 세상이었다. 수많은 한 글자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세계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갔다. 매일 길을 걷고, 힘이 들면 쉬고, 배가 고프면 먹고, 목이 마르면 마시고, 밤이 되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났다. 그 자연스러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태초의 꿈을 꾸었고 영원처럼 느껴지는 신의 향연에 하루도 빠짐없이 초대받았다. 길 위에서는 내 자신이 한없이 선명해지곤 했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지내는 한 글자들처럼 나 역시 오롯이 나로서 존재했고 또 받아들여졌다. 그래서였을까.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행복했다. 그 행복이 사라질까 두려워 슬픔에 잠길 만큼.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콱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 길에서 내가 행복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다름아닌 한 사람 때문이었다. 길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한 명의 여인이었다. 뭇 사랑의 시작이 그렇듯 우연한 만남이었다. 우리는 함께 길을 노래했고 함께 길을 껴안았다. 그 어떤 것도 아프지 않았고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나중에는 무얼 위해 걷고 있는지도 희미해져 갔다. 왜 그 머나먼 길에 올랐는지조차 잊혀져 갔다. 길고 길었던 길의 마지막 순간에는 오직 ‘너’와 ‘나’만이 남아 있었다. 언젠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 삶의 단 한 장면을 가져갈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그 시절을 품에 꼭 안은 채 가져가리라.


프랑스에서 스페인을 지나 포르투갈까지,

따뜻했던 그 길을 추억하며.






민소매를 입고 서쪽의 끝까지 함께 해준 그대에게

민들레처럼 서정적이었던 당신에게

민낯을 서로 사랑했던 우리에게


나의 아내 민서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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