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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2. 2023

글 : 글 속에서 만난 길

02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중고 자전거를 한 대 구입해 쏟아지는 빗속에서 인천에서 부산까지 633킬로미터를 종주했다. 자전거 국토종주를 마친 뒤 이상하리만큼 나는 자주 길 위에 있었다. 설악산 대청봉을 감싸 안는 일출을 맛보았고, 히말라야의 끝자락인 중국 옥룡설산에서 해발 4300미터 위를 트레킹했고,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마라톤 하프코스를 완주했고, 2주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섬인 제주도를 걸었다. 길은 왜 나를 계속해서 다시 길로 인도해 준 것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좀 더 학생이고 싶었다. 공식적으로 학생의 시간은 끝이 났지만, 학생의 한자어 學生에 담긴 의미처럼 ‘배우는 삶’을 이어가고 싶었다. 단순히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더 열심히 공부해 보겠다는 공허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더 늦기 전에 나라는 사람을 더 많이 알아가고 싶었다. 세상의 ‘길’을 통해 진정한 나의 ‘길’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해 여름에는 마음속에도 장마철의 태풍이 찾아왔다. 힘들었지만 켜켜이 쌓여 있던 많은 것들이 씻겨 내려갔다. 길 위에서 나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무엇보다 삶이 점점 충만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내 얼굴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얼굴이 주는 느낌이 참 좋았다. 역시 늦바람은 무서웠다.



비 오는 사려니숲길에서 @제주도



길을 찾아 떠나게 된 배경에는 '글'과 ‘책’이라는 또 다른 한 글자들이 있었다. 학생 신분의 마지막 시기, 조금씩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압박감이 다가올 무렵 《생각하는 인문학》이라는 책에서 읽게 된 문장 하나가 있었다.


“책을 읽지 않는 국민들이 대다수인 국가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책과 거리를 유지해 오던 나는 답을 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이 문장은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나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미래가 없는 국가에 살고 싶지 않았고, 같은 맥락에서 미래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책 속의 글들과 교감을 나누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많은 내적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묵묵히 책을 읽었던 것은 저 질문에 고개를 숙여야 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길’과 ‘글’은 그 생김새만큼이나 꽤나 닮아 있었다.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낯선 길이 한 발자국 다가와 있었으니까. 어쩌면 글 또한 하나의 길일지도 몰랐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행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관광객이나 휴양객이 아닌 여행자. 우악스럽게 배낭을 들쳐 멘 남루한 차림새, 새까맣게 탄 피부와 몇 킬로그램은 빠진 듯한 추레한 몰골.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빛나는 눈동자와 무해한 미소로 가득했다. 아름다움마저 느껴질 정도로.


여행에는 정답이 없다고도 하고 실패하는 여행은 없다고도 하지만 나에게 그들은 ‘진짜 여행’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여행자들의 글 속에서 그들이 걸어간 길을 구경하는 시간들이 점점 많아졌다. 《부시 파일럿, 나는 길이 없는 곳으로 간다》, 《79만원으로 세계일주》, 《젊음, 무엇이 있다》,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같은 책 속의 글에서 자주 그들을 만났다. 무엇이 그들을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상으로의 길로 한 발자국 나아가게 했을지 생각했다. 그들이 이방의 세계에서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을지 궁금했다. 여행이 그들의 인생에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지 알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아마도 평생 하지 못했을 자전거 국토종주처럼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세계를 돌아볼 수 있을까’라는 도깨비 같은 생각을 마주하게 되었다. 길과 글이 만나 얼어붙어 있던 바다를 깨뜨리고 말았다. 세계여행이라. 늦바람은 폭풍이 되어 있었다.





삶은 언제나 ‘돈’이라는 한 글자가 가장 문제였다. 돈은 현실 세계의 신이라 할 수 있었다. 신의 뜻을 잠시 거역하고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녀 보아도 되는 것일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빈털터리가 되어 있을 내 모습이 두려웠다. 또래 친구들은 한 걸음 더 앞서 나가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도 곁들여졌다. 하지만 그 기준으로 내 삶을 선택했다면 나는 애초에 퇴사라는 결정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커리어를 쌓고 돈을 모아가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나중에 늙어서 ‘나도 젊을 때 자전거 국토종주 하고 싶었었는데’같은 후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훨씬 더 큰 의미였다.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나이가 돈에게 무릎을 꿇기 전에, 나는 스스로를 새로운 길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보라고 강하게 떠밀었다. 가본 적 없는 머나먼 미지의 길들이 벌써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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