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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4. 2023

복 : 행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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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행복은 함께할 때 비로소 진짜가 된다)

- 영화 <인투 더 와일드>



양갈래길 표지판을 지나 아스토르가에 도착했던 날, 여섯갈래길 멤버들이 쉬고 있는 알베르게를 벗어나 그녀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녀와 단둘이 이야기할 때면 잔잔한 어색함이 감돌긴 했어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아스토르가는 벽돌로 지어진 예쁜 성당, 푸른 정원이 깔린 주교궁 외에도 사람만 한 거대한 배낭 등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은 동네였던지라 침묵을 쉽게 깰 수 있었다. 문득 두 젊은 남녀가 아름다운 유럽 마을에서 즐겁게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이상야릇한 감정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대로 덮어두었다.


알베르게 근처의 작은 공원에 돌아왔을 때는 태양이 땅 끝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황금빛 태양으로 인해 가장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일명 ‘골든타임’. 나뭇잎 사이로 내려오는 햇빛, 초록을 품고 있는 잔디밭,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원, 그리고 질문 하나로 마음을 일렁이게 했던 사람.


“민서야, 지금 사진 찍으면 정말 예쁠 거야!”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며 카메라를 꺼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포즈를 취했고 나는 정신없이 그 모습을 담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는 여섯갈래길의 품으로 돌아갔다.






     

양갈래길처럼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 올 때면 나는 그녀의 길을 따라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내 딜레마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었다는 ‘사소한’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그녀의 존재는 특별함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그녀도 나와 함께 걷는 게 싫은 눈치는 아니었는지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시간은 점점 많아져 갔고 시시껄렁했다가 진지했다가 하는 대화들이 이어지곤 했다. 파란색 지붕으로 뒤덮인 마을 몰리나세카 초입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녀에게 실화 기반의 <인투 더 와일드>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 영화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세계여행을 준비하던 때 이끌리듯 보게 된 영화. 제목 그대로 사회를 떠나 야생으로 떠나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내가 만난 외국 순례자들은 대부분 이 영화를 봤다고 했다). 주인공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했음에도 사회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현생을 떠나야만 하는 운명이었을까. 졸업 선물로 자동차를 선물해 주겠다는 부모와 여동생을 뒤로하고 가진 모든 돈을 기부하며 그야말로 현실의 모든 걸 내던진다. 자신에게 알렉산더 슈퍼트램프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는 호기롭게 알래스카로 떠난다. 그는 온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에피소드를 맞이한다. 다만 그는 사람들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머지않아 떠나버린다거나, 가족에게 연락하라는 조언을 무시한다거나, 매력적인 이성과의 관계까지 거부하는 등 계속해서 혼자만의 길을 걷는다.






감히 그처럼 현실의 삶을 모두 배제한 채 홀로 거친 모험을 떠나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삶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나를 한없이 고무시켰다. ‘그렇지, 한 번 사는 인생 저렇게도 살아야지!’ 감탄하며 홀린 듯 그의 여행을 뒤쫓아가던 나는 반전 아닌 반전으로 치닫는 결말에서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고 말았다. 그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는 정말로 현생을 떠나야만 하는 운명이었던 걸까.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자연이 야생의 얼굴을 드러내면서 고립된 그는, 버려진 버스 안에서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굶다가 실수로 독성 열매를 집어먹고는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은 가족의 따뜻한 품이었고 힘겹게 써 내려간 일기 속 최후의 문장은 나를 뒤흔들었다.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행복은 함께 할 때 비로소 진짜가 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 강을 건너 순간에, 그는 결국 사람을 그리워했다. 그가 쓴 마지막 문장은 그가 지금껏 해오던 여행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었다. 그 메시지를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가 끝난 후, 하루종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계여행을 준비하던 당시의 나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여행의 결말이 죽음이라니.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김민서는 잠자코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좋은 영화인 것 같다며 한국에 돌아가면 그 영화를 꼭 보겠노라고 대답다. 돌이켜보면 그간 우리가 나눈 대화 주제의 절반 이상은 ‘행복’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았다. 행복은 늘 어려운 문제였지만 까미노는 분명 행복으로 점철된 길이었다. 철학이나 사상 같은 복잡한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길 위로 떠도는 수많은 행복의 단편들을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었고 우리는 서로 그 순간들을 공유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 아마 그즈음부터 나는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스토르가에서






그날 27킬로미터를 걸어 도착한 폰페라다의 저녁에는 여섯갈래길 모두가 다시 만나 신나는 파티를 벌였다. 스페인의 명물이라는 뽈뽀(pulpo, 문어를 푹 삶아 올리브 오일과 파프리카 가루로 맛을 낸 스페인 음식)와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고, 보드카를 곁들인 채 크래커를 치즈 퐁듀에 찍어 먹으며 포켓볼을 치고 보드게임을 했다. 알렉산더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혼자였다면 어떤 저녁을 보내고 있었을까. 물론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겠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길의 행복을 더 진하게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그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를 비롯해 ‘여행’이라는 행위에 대한 여러 단상을 적어두었다. “이 책을 쓰는 데 내 모든 여행의 경험이 필요했다”라고 할 만큼 그가 겪은 모든 여행의 에피소드와 인용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책의 마지막 장, 그가 쓴 마지막 문단은 이러했다.


“이 책에 도움을 준 고마운 이름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여행에서 내가 만난 모든 이들, 돈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간에, 재워주고 먹여주고 태워준 무수한 타인들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특별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이들은 있다. 바로 긴 여행길에서 나를 참아준 동행들이다. 가끔을 별것 아닌 일로 다투기도 하고, 날 선 말로 감정을 다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함께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느낌을 공유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었던 이들, 이들이 없었더라면 여행은 그저 지루한 고역에 불과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지구에서의 남은 여정이 모두 의미 있고 복되기를 기원해 본다.”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소설가의 긴 여행도 이렇게 끝을 맺었다.







멤버들이 모두 침대로 돌아갔을 때,

텅 빈 알베르게의 로비 테이블에는 나와 그녀 둘만이 남아 남은 맥주를 홀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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