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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역사는 걸어감으로써 만들어진 단 하나의 길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그 길의 후예인 동시에 그 길의 개척자다. 우리는 내딛는 발걸음마다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고, 길을 따라가고, 그 뒤로 트레일을 남긴다.”
- 《온 트레일스》, 로버트 무어
레온에서 결성된 여섯갈래길의 파티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여섯 사람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지고 단단해져 갔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 순례자로서 해야 할 마땅한 역할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쉼에 매몰되지 않고 매일매일 걷는 일상이 이어졌다. 니코와 마티아스의 말을 상기하며 할 수 있는 한 깊게 길을 탐닉하고자 했다. 길 옆으로 보이는 지평선 끝이 궁금해 들판을 가로지르고, 난데없이 나타난 고양이를 따라가 보고, 그늘이 나오면 길바닥에 드러눕고, 나무 숲이 울창한 곳에서는 잠을 청했다. 길 위에서는 자주 혼자였음에도 더 이상 외롭게 느껴지지 않는 건 어디에선가 나름의 속도로 천천히 걷고 있을 그녀 때문이었다. 여전히 친하다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혼자 걸을 때면 늘 그렇듯 생각에 침잠했다. 걸어오면서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길에 대한 의문이 가끔씩 고개를 들었다. 어쩌다 길이 방법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을까. ‘way’라는 영어 단어 또한 방법이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걸 보면 길이 가진 의미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 듯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 밑의 길이라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 신처럼 비밀스럽게 느껴졌다. 까미노 또한 단순한 걷는 길이지만 동시에 삶을 풀어나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길 끝 혹은 길 언저리 어딘가에 놓여있을 것만 같은 답의 조각들을 찾고 싶었다. 초콜릿 지붕을 씌운 듯한 작은 도시 아스토르가로 가던 날 나는 길의 비밀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정오가 될 무렵에 만난 양갈래 길에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고 표지판은 두 가지의 길을 안내해주고 있었는데 눈에 들어온 것은 두 개의 화살표 위로 누군가 써둔 짧은 문장이었다.
‘choose life, U HAVE ONLY ONE.’
(삶을 선택하세요, 당신은 하나만 가질 수 있어요)
아, 길은 ‘삶’이었다. 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라는 진부한 진실. 그것이 길의 첫 번째 비밀이었다. 우리가 가는 길이 결국 우리의 삶이 된다는 것. ‘외길인생’, ‘황혼길’, ‘인생은 나그네 길’ 같은 표현들이 증명했다. 학생 때 지겹도록 들어 본 '진로'라는 단어도 '나아가는 길'이라는 뜻이었고 ‘도를 닦는다’에서의 ‘도(道)’라는 한자까지도 ‘길’을 의미하고 있었다. 진로를 선택한다는 건 어떤 길을 택한다는 말과 같았고, 도를 닦는다는 것 역시 자신의 길을 닦아가며 산다는 말이었다. 그 누구도 길 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발아래 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이로워졌다.
두 번째 비밀은 양갈래길 앞 순례자들의 행동에서 나타났다. 표지판에는 어느 방향이 몇 킬로미터인지 같은 간단한 정보만이 적혀 있었다. 어느 길을 택하든 같은 목적지로 간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겠지만 순례자들은 가이드북이나 지도를 들여다보며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순례자들이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는 건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앞서 걷는 다른 순례자들이 어느 길로 가는지 보는 것이다. 대개는 순례자들이 더 많은 쪽을 택해 뒤따라갔다. 그만큼 안전하거나, 효율적일 테니까. 반면 사람이 없는 길을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도 혼자 있고 싶거나 남들과는 다른 길이 가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어떤 길이든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선택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길이 된다는 것, 그것이 길의 두 번째 비밀이었다.
몇 달 전 떠났던 중국 옥룡설산에서의 기억 하나가 드리워졌다. 은빛 용이 누워 있다는 뜻을 가진 옥룡설산은 그 이름처럼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웅장했다. 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동방의 대장군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거대한 설산 봉우리들을 옆에 두고 걷는 일은 감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자연은 험악한 야생의 얼굴을 드러냈다. 트레킹 마지막 날, 옥룡설산에서 개방된 길 중 가장 높은 곳까지 가는 샹그릴라 코스. 해발 4300미터를 넘어 고산병을 겪어가며 더 이상 갈 수 없는 종착지에 다다랐을 때였다. 마침내 웅장한 협곡 한쪽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낭떠러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험준한 설산 꼭대기에 올라섰다는 승리감에 젖어 있었다.
사진을 찍으며 한껏 도취되어 있던 그때 뒤통수 너머로 싸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뒤를 돌아보니 함께 왔던 일행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허겁지겁 일행들을 뒤쫓아가려 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물리적인 길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눈과 흙이 섞인 채 온갖 종류의 식물들로 뒤덮여 있어 지나온 발자국들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 천지가 분간이 되지 않았고 내가 올라온 길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길을 더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웠다. 깊은 산속에 혼자 남아서 죽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패닉이 찾아오는 듯했다. 방금 전까지 호기롭게 감상하던 산봉우리가 베일을 벗어던지고 서슬 퍼런 송곳니를 드러냈다. 외딴 행성이나 우주에서 홀로 죽어갈 때의 공포감이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옛날 동화책에서나 보던 ‘길을 잃는다’는 일을 실제로 마주하고 나자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감이 몰려왔다. ‘길을 잃으면 헤매면 그만이다’라는 낭만적인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목숨이 걸려 있었다.
바로 그때 노란 형광색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길을 이끌어 주신 여행사 과장님의 재킷이었다. 사람,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는 한참 내려가다가 내가 보이지 않자 다시 돌아와 주셨다고 했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옥룡설산에서의 경험은 이미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사람이 길이 되어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문득 까미노에 오기 몇 달 전의 길을 헤매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퇴사를 앞두고 길을 찾지 못했던 내 모습이. 당시에도 길을 잃었던 건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곧이어 자전거 무전여행을 떠났던 동창 녀석, 강연으로 만났던 도전의 아이콘, 글 속에 살아있던 수많은 여행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내게 새로운 길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고 있을 때, 앞서 걷는 순례자들 사이로 에메랄드색 수건이 보였다.
다시 한 걸음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