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 〈가을사과〉, 이철수
까미노가 다시 시작되었다. 모두가 빈둥거리며 일어난 레온의 아침. 아파트먼트에서 하나 둘 빠져나온 여섯 명의 순례자들은 다들 비슷한 시간에 출발했지만 또다시 길 위에서는 각자의 길을 걸었다. 연박을 하며 푹 쉬었던 탓인지 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길은 300킬로미터 남짓, 이제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괜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듯했다. 날씨는 아주 맑았지만 찌는 듯한 한낮의 더위는 여전했고 다음 마을까지는 약 26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두어 시간을 걷다가 여느 때처럼 카페에 눌러앉아 커피와 빵으로 오전의 여유를 즐겼다. 하루가 시작되고 나면 그 따뜻함과 달콤함이 채워주는 오전의 시간이 언제나 기다려졌다. 다시 또 한 시간쯤 걸었을까. 한적해 보이는 그늘진 벤치가 보여 햇빛도 피할 겸 잠시 앉아있다 가기로 했다. 바로 그때, 저 멀리로 낯익은 에메랄드색 수건을 두른 순례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가 지나갔다.
길 위에서 김민서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쉬고 있을 때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는 건 그녀가 나보다도 천천히 걷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토록 빠르게 걷던 사람이 갑자기 왜 나보다 뒤에 있는 걸까. 발코니에서 했던 나의 이야기가 그녀로 하여금 작게나마 흔들림을 느끼게 한 것일까. 내 이야기가 그녀의 빠른 걸음을 늦추게 한 것일까. 서성이는 길고양이 같았던 내 고민과 이야기가 드디어 갈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3주가 넘게 걸어오는 동안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나보다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었다는 방증이라는, 부정하기 어려운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불현듯 그녀와 같이 걸으며 더 많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이것은 불확실하면서도 분명한 감정이었다. 나를 이미 앞질러간 그녀를 따라잡을 자신은 없었지만 그녀가 내 이야기에 정말 관심을 가져 준 것이라면 분명 어디에선가 천천히 걷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어디선가 멈춰서 잠시 쉬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빵과 귤을 마저 다 먹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희미해진 잔상을 따라갈 작정으로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뜨거운 태양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황금빛 갈대밭을 옆에 끼고 걸음을 이어갔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노란색 화살표가 그려진 작은 회색 표지석들을 몇 개 지나치고, 순례자들이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콜라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는 카페를 지나쳤다. 어느 작은 담벼락 위에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알 수 없는 포도, 땅콩, 사과가 담긴 상자와 순례자들의 여러 감정이 남겨진 방명록이 놓여 있기도 했다. 옆에 있던 파란색 펜으로 큼지막하게 'Gracias(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크리덴시알을 꺼내 방명록 옆에 놓인 도장도 찍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그녀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 한 시 무렵, 길 왼편으로 높지 않은 아담한 폐건물이 보였다. 주위로 송전탑과 나무 몇 그루가 쓸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빛을 가릴 수 있는 나름 널찍한 그늘이 보였고 쉬기에도 적당해 보였다. 잠깐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그늘 아래로 에메랄드색 수건이 보였다.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건물 벽에 기대고 앉아있는 그녀 옆으로 나도 드러눕듯 앉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등장에 반가운 마음을 급하게 억눌러야 했다. 그녀와의 길 위에서 나눈 첫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와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대화를 이어갔다. 내 생각은 맞았다. 전날 밤 레온의 발코니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그녀는 의식적으로 천천히 걸어보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자신의 본래 성격이 대부분의 일을 빠르게, 급하게, 서둘러하는 편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끝이 가까워지는 아까운 순례길을 이제부터라도 한 발 한 발 천천히 밟아보기로 했다고. 그녀는 빠르게 걷는다는 소문답게 쉴 때는 배낭조차 풀지 않았고 카페에서도 15분 이상 앉아 있어 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어딘가 마음에 이끌려 가까이 가보고 싶을 때가 있었음에도 대부분 빨리 지나쳐오며 걸었다고. 그런 사람의 눈에는 오후가 다 지나서야 뒤늦게 도착하는 내가 괴상해 보일 법도 했다. 까미노를 대해 온 내 방식에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지만 시간과 속도에 구애받지 않겠다며 혼자 발버둥 친 400킬로미터가 넘는 시간들이, 과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닿았던 그때 비로소 나는 길로부터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둘이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다소 어색하긴 해도 대화는 곧잘 편하게 이어졌다. 같은 그늘에서 잠시 쉬던 나이 지긋한 이탈리아 순례자 아저씨가 나눠주신 호두를 다 먹어갈 때쯤 우리는 다시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길로 올라섰다. 어쩌면 절대 같이 걸을 수 없었을 두 순례자가 함께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