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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3. 2023

날 : 왜 그렇게 천천히 걷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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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날이라는 말이 좋다.     

어느 날 나는 태어났고
어느 날 당신도 만났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어느 날이니까.

나의 시는 어느 날의 일이고
어느 날에 썼다.

- 「어느 날」, 김용택



내가 김민서를 처음 본 것은 까미노를 걷기 시작한 지 12일 차, 레온에 도착하기 약 일주일 전에 머물렀던 산 후안 데 오르테가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알베르게는 그동안 만나왔던 어떤 곳보다 큰 규모를 자랑했다. 학교와 성당을 합쳐 놓은 듯한 베이지색 수도원 알베르게는 파란색 하늘과 조화를 이루며 여유로운 풍채를 뽐냈다. 널찍한 광장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알베르게 앞은 이미 도착한 수많은 순례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오후 네시가 다 되어갈 때쯤 그곳에 느지막이 도착했다.


오르테가에 도착하기 30분 전쯤이었다


크리덴시알에 도장을 찍고 체크인을 하는데 박영민이 왜 이리 늦었느냐며 나를 타박했다. 세탁기를 함께 쓰려고 하니 빨리 옷을 가져오라는 얘기였다. 어지간하면 간단한 손빨래로 그날그날의 빨래를 해결하곤 했지만 세탁기나 건조기가 있는 알베르게에서는 순례자들끼리 한 두 푼씩 돈을 모아 문명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부랴부랴 이름도 모르는 대여섯 명의 옷가지 더미로 땀에 절은 내 옷도 함께 넣고 났을 때. 그때가 김민서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먼저 도착한 박영민이 그녀의 일행과 함께 빨래를 돌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큰 키에 까만 민소매 나시와 붉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와 도회적인 느낌이 풍기는 얼굴 때문인지 '까미노보다는 유럽 대도시에 어울리는 사람 같은데 무슨 연유로 여기에 오게 됐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 이후 저녁식사 시간에도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비슷한 나이 또래인 것 같아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따로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고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만 인연은 스칠 듯 계속되었다. 다음 날 부르고스의 야경을 보는 무리 속에 그녀가 있었다. 그 후 이틀 뒤가 여섯갈래길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서 만난 카스트로헤리츠였다. 그때부터 며칠을 연속으로 함께 보내고 나서 레온에서 여섯갈래길이라는 이름이 생기고 만 것이었다.






며칠의 시간 속에서 그녀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동갑내기라는 것, 일을 그만두고 여기에 왔다는 것, 몇 년 전부터 까미노에 오고 싶어 했다는 것, 오랜 연애가 끝났다는 것, 사랑이라는 감정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빠르게 걷는다는 것. 웬만한 남자 순례자들보다도 빠른 속도로 걷는다는 얘기를 어깨너머로 몇 번 들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3주가 넘게 걷는 동안 길 위에서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마주친 곳은 언제나 다음 마을의 알베르게였다. 온갖 게으름을 부리며 느리게 걷는 사람과 새벽같이 떠나 빠르게 걷는 사람이 한 방향으로 걷는 길에서 만날 확률은 사실상 제로였다.


레온에서 아파트먼트를 빌렸을 때도 그녀는 다음 날 바로 출발할지 하루 더 연박을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모두의 설득에 못 이기는 척 연박을 결정했지만 인천행 비행기표까지 미리 끊어놓은 상태라며 전체적인 일정이 밀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했다. 돌아갈 날짜가 정해진 마당에 하루를 더 쉬게 되면 그만큼 부지런히 걸어야 할 테니까. 근심에 찬 그녀의 얼굴 위로 며칠 전 만난 덴마크인 마리가 겹쳐졌다. 동시에 그간 길 위에서 나를 괴롭히던 딜레마와 니코와 마티아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또 한 번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괜한 마음이겠다 싶어 입을 닫았다.







레온의 밤, 노란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던 아파트먼트의 작은 발코니. 왁자지껄한 파티를 뒤로 하고 잠시 찬 바람을 쐬고 싶어 밖에 나갔을 때 어쩌다 보니 그녀와 단 둘이 함께 있게 되었다. 항상 무리 속에서 같이 웃고 떠들었지 둘이서는 얘기를 해 본 적이 없어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오가는 짧은 대화는 어색하기만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그녀가 대뜸 말을 꺼냈다.


“예전부터 계속 궁금했던 게 있어.”

그녀의 눈동자에 어떤 호기심이 보이는 듯했다.


“너는 왜 그렇게 천천히 걷는 거야?"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 먼저 내가 왜 천천히 걷는지 물어봐 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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