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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3. 2023

연 :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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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이 더 사랑받기 위한 거 아냐?”

- 영화 <비포 선라이즈>


순례길 대신 까미노라는 단어를 더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어로 이 길의 공식적인 이름은 산티아고 순례길이지만 점점 까미노라는 단어가 익숙해져 갔다. 그건 아마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말하게 되는 ‘부엔 까미노’ 덕분일 테다. 순례길이라는 단어에는 왠지 모를 엄숙하고 무거운 어감이 묻어 있어서일까. 같은 의미의 단어인데도 까미노는 한결 가벼웠다. 야고보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순례길’ 대신, 그곳이 어디든 나만의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것 같은 ‘까미노’가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스페인어 화자가 듣기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까미노에서는 대자연의 정기를 받는다는 말을 피부로 느끼곤 했다. 밤이 되면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에서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보았다. 이슬이 깔린 아침 새벽에 걸을 때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별들 속에 정신없이 파묻혔다. 16일 차 새벽에는 좋아하는 몽환적인 음악을 들으며 차가운 공기 속에서 걷고 있었다.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접어들 즈음 쏟아지는 별들을 향해 두 팔을 천천히 힘껏 벌려보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조용히 우주 속에 자유로이 떠도는 듯한 기분.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있음에 북받쳐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여기까지 무탈하게 걸어왔음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길 위에 있음에, 건강히 살아 있음에,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음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별을 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걷는 일이다. 아침마다 등 뒤로 그간 걸어온 길의 끝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만나왔다. 별들의 고요한 파티가 끝나면 새벽의 적막을 깨고 태양이 떠올라 온 하늘을 붉게 칠했다. 부르고스 이후로 지금까지 걸어온 메세타의 아침 태양은 더욱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분홍색과 파란색이 묘하게 그러데이션을 이루며 섞이는 황홀한 하늘은 금세라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했다.





     

사랑이라. 나의 소식을 종종 전해 듣는 친구들의 관심사는 기대는 않지만 혹시 생길지 모르는 나의 로맨스에 있는 듯했다. 걷다가 마음에 드는, 혹은 마음이 맞는 순례자를 만나지는 않았느냐고 물어오는 것이다. 그런 운명적인 러브 스토리를 전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마는 장담하건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몇 개월 전, 오랜 연인과의 관계를 정리한 이후 나는 다시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세계를 누벼보겠다고 떠나온 나에게 사랑이라는 건 관심 밖의 사항이었고 사치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길에 올라서기로 했을 때부터 그런 일말의 가능성은 접고 왔다.


여기에 몇 가지 이유를 더해보자면 까미노는 내 세계여행에서의 첫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후 여정을 끝내는 프랑스길 이후로도 포르투갈, 모로코, 이집트까지의 여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모로코에서는 말로만 듣던 사하라 사막을 눈에 담고 이집트에서는 배낭여행자들의 무덤이라는 다합에 한 달 정도 눌러앉아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다음 몇 개월간의 계획을 꾸려 볼 생각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 기적처럼 사랑에 빠진다 한들 끝이 보이는 불장난에 불과할 일이었다. 타들어가는 시커먼 얼굴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맵시 좋은 옷을 입을 일도 없는 데다가, 매일매일 땀에 찌드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다니. 게다가 까미노는 동행이 필수인 여행도 아니었다. 그저 만났다가 헤어지는 곳. 여하튼 이러나저러나 내가 이 길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건 좀처럼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느새 까미노 위에 올라선 지 절반 가까이 되어갔다. 어김없이 등 뒤로 동이 터오는 마법 같은 하늘 아래에서 싱그러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아침을 만끽하며 걷고 있는데 한참 앞에 놓여 있는 길가의 벤치에 긴 금발의 순례자가 앉아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었지만 괜한 오지랖은 부리지 않기로 하고 그녀 앞을 지나칠 때였다.


"Excuse me, do you speak English?"

(저기 혹시 영어 할 줄 알아요?)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전형적인 서양식 금발 곱슬머리에 큰 키와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파이더맨의 또래처럼 앳된 얼굴이었다. 외국인들의 나이를 추측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춘기의 전유물인 띄엄띄엄 붉게 난 피부 트러블이 그녀의 나이를 얼핏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전날 53킬로미터를 걸었다고 했다. 두 귀로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을 다시 물었지만 일그러진 표정과 부어오르고 있다는 발을 보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 이틀을 걸어야 하는 긴 거리를 하루 만에 걷다니 충격적이었다. 다만 지나가던 사람을 멈춰 세운 것 치고는 뭘 달라는 요구를 하지도 않았고 필요한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도 괜찮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덴마크 사람이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갭 이어(Gap year, 서구권 학생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갖는 일종의 휴학 기간)를 보내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가 빨리 걷는 이유는 얼른 까미노를 마치고 다음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일정이 그렇다니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발의 상태도 그렇고 노파심이 들어 조심스레 니코와 마티아스와의 만남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북유럽 사람들은 뭔가 더 여유가 있을 것 같았기에 조금은 귀 기울여 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건 순전히 내 편견일 터였다. 시답잖은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괜히 민망해졌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00킬로미터를 걸으러 혈혈단신으로 떠나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일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과연 무엇을 했었나.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나 싶어 부끄러웠다.


우리는 한국과 덴마크의 삶에 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그녀는 어떤 도움보다는 말을 나눌 상대가 필요했던 것일까. 허연 즙이 흘러나오는 무화과를 따먹으며 걷다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퇴사 후 인상 깊게 봤던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떠올랐다. 미국인 남자와 프랑스인 여자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내리면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 그녀에게 그 영화를 보았냐고 묻자 좋아하는 영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에 재미있게 볼 만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인 제시와 셀린을 서로 아는 사람인 것 마냥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하고 있던 와중 그녀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I think that movie is really romantic but just a movie. It is not real.”

(저는 그 영화가 정말 로맨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영화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에요)


역시 여행길에서의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전 세계 어딜 가나 다르지 않구나.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로망. 상상을 해볼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 조금 더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었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그쯤 끝이 났다. 오래갈 대화는 아니었다. 하루에 53킬로미터를 주파하는 사람과 20킬로미터조차 느릿느릿 걷는 사람의 걸음이 잘 맞을 리 만무했으니까.


길 옆으로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졌을 때 그녀는 빠르게 주욱 내질러갔고 나는 계속해서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의 늪에 빠졌다. 그건 영화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라던 그녀의 말을 상기해 보았다. 말씨름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그녀의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기에 숱한 젊은이들의 로망이 되는 것 아니겠냐고. 사랑은 원래 비현실적인 영화처럼 닿기 어려운 꿈처럼 존재하는 법 아니겠냐고.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아니고서야 누구나 로맨틱한 사랑 한 번쯤 가슴에 품어보지 않느냐고. 설렘과 긴장의 연속인 여행지에서라면 더더욱.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앞으로 누구와 어떤 사랑을 하게 될까? 다시 사랑이란 걸 해볼 수는 있을까? 정오가 가까워지며 메세타의 분홍빛 하늘은 천천히 푸른색으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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