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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흠이 있다.
그것이 바로 빛이 들어오는 방법이다."
- 레너드 코헨
시간과 속도에 대한 딜레마는 웅장한 대성당이 있는 북부의 큰 도시 부르고스를 벗어나던 날 마침내 힘을 잃었다. 부르고스 이후부터는 메세타라 불리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평원이 시작되는 구간이 등장했다. 끝 모를 지평선이 이어지는 곳. 복잡다단한 세상을 땅과 하늘로만 구분 지어 놓은 곳. 며칠간 이어질 메세타 구간이 지루하다며 버스로 건너뛰는 순례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하지만 메세타 평원은 어떤 길보다 더 ‘산티아고 순례길’스러운 길이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게 선명해졌다. 메세타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가는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쉽게 그 자리를 뜨지 못한다. 저마다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기 때문이리라.’라는 글처럼 메세타 구간에서는 광활하게 펼쳐진 평원 위에서 저마다의 땅을 한없이 헤엄칠 수 있었다.
메세타에 진입한 그날 점심 무렵, 시선이 머무른 곳이 있었다. 저 멀리 지평선 한가운데에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윈도우 배경화면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보이는 나무 하나를 보며 참 그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 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내 몸을 뉘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빌어먹을 딜레마가 또 작동해 버렸다.
‘지금 저기서 쉬고 가겠다고? 벌써 오후 한 시가 넘었어. 또 쉬었다간 오늘 아주 늦게 도착할 거야. 날씨는 더 뜨거워질 거고 너는 더 힘들어질 거야. 잘 생각해.’
걸음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걷지도 멈추지도 않는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십오 분이 넘도록 그 바다 같은 땅 위를 서성이며 걸었다. 옆으로 벌써 몇 명의 순례자들이 지나쳐갔다. 내가 서 있던 곳은 길이 아니라 선택의 기로에 가까웠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의 고민처럼 무엇을 해야 옳은 판단인지 알 수 없었다. 시계와 나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명확한 결론 하나가 나왔다. 지금 지나치고 나면 평생 저런 나무는 아마 다시 못 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미련한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후회하지 말자는 생각 하나로 힘겹게 나무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갈까 말까 고민이 될 때는 가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씀도 힘을 보탰다. ‘여기로 가도 될까’, ‘괜찮은 거 맞겠지’, ‘괜찮을 거야’ 걱정과 위로를 삼키며 한 발 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 같았던 나무는 금세 가까워졌고 눈앞의 현실이 되어 있었다.
혼자 조용히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잘 요량으로 누울 만한 자리를 찾으려던 그때였다. 나무 뒤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고독해 보이던 나무 뒤로 나타난 누군가의 존재에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는 양배추, 방울토마토, 올리브같은 야채가 담긴 통을 들고 있었는데 아마 점심을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제가 방해하는 건 아닌가요?"
나무 그늘을 즐기며 낮잠을 자려던 내 계획은 그 인사치레 같았던 질문 하나 덕분에 수포로 돌아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손사래를 치며 이야기를 쏟아낸 것이다. 그의 이름은 마티아스. 아르헨티나 출신의 수의사이자 세계여행자다. 갈색의 긴 곱슬머리를 머리 뒤로 묶고 있었고 같은 색의 콧수염과 턱수염을 잔뜩 길렀으며 강렬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가방에 덕지덕지 가득 붙어있는 여러 나라의 국기들이 그가 지금껏 걸어온 길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무데라스Muderas’라는 것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무데라스는 명상 기법 중 하나인데 여러 가지 삶의 개념이나 가치들을 떠올리며 그에 맞는 손동작을 취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여러 형태로 깍지를 끼기도 하고 열 손가락의 끝을 서로 맞대기도 하는 등 손동작은 꽤나 복잡해 보였다. 그가 하고 있던 명상은 ‘인류’, ‘사랑’, ‘사람’에 관한 것으로 대단히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주제들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명상이었지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얼마 후 그가 나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시간과 속도.”
지체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균형점을 찾기 위해 남 모르는 속앓이를 해왔고,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생각이 거듭될수록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요상한 사람에게 괜한 넋두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메세타의 평원을 바라보고 있는 마티아스의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The most beautiful moment on Camino happens, when you stop.”
(이 길에서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네가 멈출 때야)
내 느린 발걸음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그의 대답을 들었던 순간 나를 뒤흔들던 딜레마의 소용돌이는 한낮의 꿈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마티아스는 새벽 세 시에도 걷는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길바닥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본다고도 했다. 알베르게가 없어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가고 싶으면 가고 멈추고 싶으면 멈추는 순례자였다. 진정 시간과 속도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마음속으로 품어왔던 걷는 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부엔 까미노'조차 ‘루즈 엔 뚜 까미노(Luz en to camino, 당신의 길에 빛이 함께하길).’라며 자신만의 방식대로 썼다. 아아, 그는 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선지자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나무를 지나쳐 곧장 직진했다면 그를 만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다음 마을인 온타나스까지 함께 걸었다.
니코가 다져 놓은 땅 위로 마티아스가 신전을 세워주었다. 그곳에선 무한한 위로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길 위로 세워진 나만의 신전. 조바심이 생겨날 때면 언제든 그곳을 찾을 것이다. 그들의 말은 모든 길이 끝날 때까지 나의 길을 지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