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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3. 2023

쉼 : 시간과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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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you find what you were looking for?”
(당신이 바라던 것을 찾았나요?)

- 나헤라의 알베르게의 벽에 적혀 있던 글


걸으면 걸을수록 커지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첫날부터 시작된 ‘왜 빨리 걸어야 하지?’에서 확장된 고민이었다. 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시간’과 ‘속도’라 할 수 있었다. 순례길 첫날 니코가 무심하게 흘린 한 마디는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고 나는 나만의 시간 속에서 나만의 속도대로 걸으려 애를 썼다. 새벽같이 출발해 빠른 속도로 걸어 다음 마을에 일찍 도착하더라도 저녁을 먹기 전까지 하는 것이라곤 몇 가지의 사소한 일들을 마치고 일기를 쓰거나 늘어져 쉬는 것뿐이었다. 순례길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는 하겠지만 차라리 길 위에서 쉬고 싶었다. 길은 걸으라고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느긋한 노력의 결과였을까. 점심쯤이면 다음 마을에 도착하는 일반적인 순례자들의 모습과는 달리 나는 타오르던 태양이 지평선에 가까워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날의 알베르게에 다다랐다. 한참을 먼저 도착해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거나 그날의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짐을 푼 지도 여러 번. 몇 번 만나왔던 한국 순례자들 사이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가장 느린 순례자’라는 요상한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비단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만 그런 건 아니었다. 순례자들은 보통 카페에서 쉴 때에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출발할 채비를 했는데 간혹 오랫동안 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였고 자리를 잡고 나면 갖은 늑장을 부렸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매장의 인테리어나 메뉴를 구경하고, 지나가는 각양각색의 순례자들을 관찰하고, 발 밑으로 다가오는 강아지나 고양이들과 인사하고, 30만 원짜리 중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보면 한 시간은 금방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쭉 뻗은 텅 빈 차도에 배낭을 베개 삼아 드러누운 채 일출을 바라보았고, 마을 근처의 한적한 벤치에 앉아 삶은 계란이나 바나나를 까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9일 차에 도착한 나헤라에서는 그 마을을 둘러싼 작은 강과 언덕 사이에서의 목가적인 평화로움이 마음에 들어 하루를 더 머물렀다. 걷는 길도 좋았지만 걷지 않는 길은 그보다 더 좋았다.


쉬어가기
나헤라의 시간






하지만 이따금씩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시간과 속도를 상대하는 싸움 속에서 가끔 벽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는 건 아무래도 ‘사람’ 때문이었다. 애써 나만의 시간과 속도를 찾다 보면 어느새 사람의 곁이 그리워지곤 했다. 내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특히 그간 유대감과 동질감이 쌓이며 어느새 많이 가까워진 박영민, 류성민, 김선화의 얼굴이 종종 떠올랐다. 정이 든 것일까. 그들이 잘 걷고 있을지, 어디쯤에 있을지, 별 일은 없는지 궁금했고 오늘 저녁은 그들과 어떤 음식을 먹게 될지 생각했다.


그들과 친해지긴 했지만 우리는 각자의 시간과 각자의 속도 속에서 걸었다. 몇 시에 출발할지, 어디까지 갈지 같은 다음 날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뿐 그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순례길 초반에는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왠지 함께 다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지만(종종 이런 의무감 때문에 함께 걷는 이들이 있는 듯했다) 그들과는 그런 불필요한 감정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간섭하려 하지 않고 각자의 순례를 존중했다. 덕분에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걷고 쉴 수 있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가끔은 함께 걷고 또 함께 쉬고 싶었다. 혼자 떠나왔고 혼자의 시간을 갖고 싶었으면서 철저히 혼자가 되기는 싫은 모순된 욕망.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또 다른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꾼 것은 아니었을까. 그 딜레마에 빠질 때마다 알 수 없는 고통스러움이 느껴졌다.


하루는 그들에게 내 고민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박영민은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류성민은 원래부터 지독히도 빠르게 걷는 청년이었고 김선화는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이 싫다고 했다. 그들에게 니코가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유대감 속 공감대의 부재가 조금 슬프게 느껴지는 듯했다. 어쩌면 정말 나 혼자 불필요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절대 짧지 않은 800킬로미터라는 긴 거리, 매일매일 주어지는 20~30킬로미터의 순례, 살갗을 태워버릴 듯한 강렬한 햇빛, 허리부터 무릎, 발목, 물집까지 끊임없이 신음하는 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부지런히 걸어 그곳에 도착해야 한다는 거대한 목표는 쉼에게 자리를 내어 줄 만큼 여유가 없는 것일까. 순례길 위의 주인공은 걷는 것이지 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아, 멈추는 것은 걷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구나.







니코의 말을 들은 이후 이 길은 빠른 속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왜 체할 듯 급하게 걸어야 하냐며, 자신만의 시간과 속도대로 가야 한다며 고작 며칠의 길 위에서 개똥 같은 철학을 고집해 왔다. 하지만 다른 순례자들이 주는 든든함과 따뜻함 속에서 걸으려면 최소한 나보다 빠르게 걷는 그들의 시간과 속도에 맞추어야 했고 나는 그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고독한 나그네처럼 이 길의 끝까지 온전히 혼자 걸어갈 자신 따위는 없었다. 단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 게으르고 느긋한 성격을 덮으려는 마음이 반영된 것일지도 몰랐다. 단절과 만남을 동시에 원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런 내 모습이 한 편으로 우스워 보일 때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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