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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 Jun 29. 2022

제주도에서 알게 된 맛집의 의미

제주 연정식당, 카페 그러므로

이 글은 절교했던 친구와 다시 연락하게 되면서 30대 후반의 두 친구가 함께 다녀온 제주여행 이야기를 엮은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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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교했던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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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혼은 관계의 무덤인가



그녀는 거의 5년 만에 연락이 된 그날도, 갑자기 나에게 부산 여행을 제안했었다.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간절한 그녀의 마음을 외면하기 어려워 흔쾌히 가게 된

장마철 2박 3일 제주도에서의 시간.



여행 전 친구는 내게 카톡으로 맛집 리스트를 빼곡히 보내왔다. 누가 봐도 4박 5일 정도는 지내줘야 소화 가능한 양이었다.

'얘, 먹는 거에 생각보다 진심인데...?'


별 기대 안 했던 그녀가 선별한 맛집들은 제주도민도 인정하는 '찐 맛집'이었다.

친구의 첫째 애가 어릴 때 온 가족이 제주에서 1년간 살아보며 거르고 걸러 남은 맛집들이었다.







렌터카를 넘겨받고 바로 가게 된 연정식당.

가브리살과 김치찌개, 청국장 맛집이라는 이곳엔 흐린 안개가 자욱이 깔린 오후 2시쯤 방문하게 되었는데, 점심때가 지나서 그런지 마침 손님이 아무도 없어 호젓한 분위기였다.


정갈히 놓인 반찬과 빠른 손놀림으로 고기를 구워주는 이모에게서 맛집의 포스가 느껴졌다. 잘 구워진 가브리살을 큼큼한 갈치 맬젓에 푹 찍어 한 입 먹는 순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찐 맛집!"


고기가 이렇게 부드럽게 씹히다니! 육즙이 가득한데 갈치 맬젓과의 조화로 느끼함은 싹 잡히고 고소함만 남았다.


뒤이어 나온 김치찌개는 내가 보통 먹던 백반집에서의 김치찌개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오랜 시간 발효를 거쳐 푹푹 찢어지는데 그 양념과 국물이 너무나 깊으면서 신선한 맛이었다. 나는 묵은지보다는 겉절이를 선호하는 입맛인데, 이 집의 김치찌개는 모든 면에서 밸런스가 참 좋아서 내가 생각했던 묵은지의 관점을 달리 보게 되었다. 과도하게 푹 익어 쉰내가 나거나 의도적으로 멸치국물 맛을 많이 내고 슴슴하여 찌개가 아닌 국 같은 그것이 아니었다. 가브리살과의 조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여행지에서는 무조건 이것저것 다 시켜보고 배불러도 계속 먹는다는 그녀는 용감히 가브리살 4인분을 주문했고, 양이 적은 나를 몰랐던 그녀가 3인분이나 해치웠다.

너무 맛있는데 배가 불러 더 먹지 못하는 게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부른 배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도착한 카페 '그러므로'.

아메리카노를 시키려다 주문해본 시그니쳐 커피 '메리하하'.

부드러운 커피 향과 달콤하며 씁쓸한 맛이 조화로웠다. 라떼이면서 방탄 커피 같은 느낌? 시그니처일 만했다.


배는 부르지만 모든 메뉴를 주문한다는 그녀답게 두 종류의 마들렌과 스콘, 피칸파이 2개를 함께 주문했다. 친구는 피칸파이를 들고 열띤 설명을 이어갔는데, 내 친구의 극찬을 받을 만했다.


바닥은 진짜 얇은 타르트인데 겉면에 바삭함과 딱딱함을 유지하여 구워내었고, 그 얇은 바닥 위부터 도톰히 올라온 꼭대기까지 견과류가 그야말로 가득 들어있었다. 견과류와 함께 채워 넣은 필링도 많이 달지 않아, 타르트는 커피숍에서 구워낸 빵이라기보다는 베이커리 맛집에 가서 줄 서서 사 올 만한 맛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식당에서도 대부분 디저트를 파는데, 밥을 먹고 난 후 달콤함으로 입을 가시는 그들 식습관의 이유를 제주도에서 진정으로 공감했다. 짠 식단의 밥을 먹고 난 후 달달함은 진리다.


아... 스콘...

내가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스콘은 대부분 조금 달아 늘 아쉬웠는데, 그러므로의 스콘은 겉바속촉의 정석을 유지하면서 진짜 담백하다. 맛있는 밀가루로 구워내어 설탕을 적당히 배제하면 이런 맛이랄까. 그리고 함께 나온 잼!! 직접 담근 잼 같은데 스콘에 얹어 먹으면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커피와의 조화도 정말 일품이었다.


배가 불러도 커피숍은 부지런히 들러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았다.






그러므로의 커피숍은 회색 벽돌로 건물을 지어서 모던한 느낌이 들어 공간이 주는 편안함도 있는데, 건물 주변에 넉넉한 잔디가 있어 봄이나 가을에 햇볕이 적당히 따사롭고 바람이 청량한 때에는 잔디에서 디저트를 하면 천국 같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커피숍을 방문한 지난 주말은 장마철이 시작되는 습기 지옥이어서 아쉽기만 했다.


주차된 차에 타며 우연히 둘러본 손님들의 차량 중 '허'나 '호'의 비율이 20%쯤 되어 보였다.

"여기 제주도민이 오는 맛집이었구나!'


나는 내가 먹을 것에 이렇게 흥분할 줄 아는 사람이란 것도, 이렇게 심취해서 음식에 대해 길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긴 시간 줄 서는 수고도 마다않는 열정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다. 물론 친구랑 가게 된 모든 맛집들을 기다림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던 행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더라도 기다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느껴졌다.







친구랑 식사와 커피를 나누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음식에 대한 생각을 나누게 되었다.



나 : 너가 데려온 모든 곳의 맛이 감동스럽다.
친구 : 그치? 내가 제주도 살면서 유명한 데는 다 가봤는데 80%는 실패하고 살아남은 곳만 우리가 오는 거야. 나는 맛있는 거 먹을 때 정말 행복하더라고.
나 : 그렇지. 먹는 것은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잖아. 그런데 나는 뭔가 맛있는 걸 먹으려고 애써서 찾아다녀본 적이 없어서 너 덕분에 '맛있는 걸 먹는 즐거움'을 새롭게 알아가는 것 같아.
친구 : 맞아, 그 즐거움이 정말 커. 그리고 소중한 사람과 함께 그 음식을 나눌 때 즐거움이 크잖아. 나 일상에서 그 즐거움을 잘 못 누려.



대화 이후 우리는 각자 남편과 얼마나 음식 성향이 맞지 않는지를 견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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