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 앞 교차로. 서소문에서 북창동 방향으로 이어진 건널목에 꽤 오래된 이스트팩 가방을 멘 사십 대 중반의 남자가 서 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고개를 남대문 방향으로 돌려 흰색의 고층 건물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한다. '그래, 설마 인생이 외길이기야 하겠어?'
하나, 인생이 외길은 아니잖아
오늘이 희망퇴직을 신청한 남자의 마지막 퇴근이고, 남자는 십수 년을 다닌 그 건물에서 지금 막 나오는 길이다. 건물을 벗어나면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이별하는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정면에서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몰래 훔치듯이 그렇게 사진을 찍은 모양이다. 사진도 흔들리고 초점도 흔들리고, 그럴 리 없는데... 마음도 흔들렸던 것 같다.
십수 년 회사 생활이라고 해봐야 절반도 채워지지 않은 오래된 국방색 이스트팩 배낭 하나가 전부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달려왔고 어떻게 버텨왔는지는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 남자만의 일도 아닐 테니 그다지 자극적인 감정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마지막이다, 이젠 정말 끝이다 싶은 그런 순간에 부닥치는 일말의 해방감과 이별의 공허함 중간쯤에 이르는 어떤 생경스런 감정이 있다.
절반의 무게를 지닌 배낭을 메고 시청 앞 건널목 앞에 서서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MP3를 틀었다. 남자는 종종 노래를 고르지 않고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대로 듣기를 즐겼는데, 이번에 랜덤 한 노래는 시나위의 '서커스'다. 나쁘지 않다. 시나위를 거쳐 간 여러 음색 중에 김바다의 그것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건널목을 건너는데 남자는 갑자기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불안인지 희열인지 아니면 해방감인지 책임감인지 모를 오만가지 감정이 한데 묶여 북받쳐 왔다. 어쩌면 과거의 시간에서 벌어놓은 판돈과 현재의 단단한 시간을 볼모 삼아 불확실성과 불가지성으로 가득한 미래를 놓고 도박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서커스
시나위
널 힘들게 만드는 모든 것이
너에게만 있다고 생각지 마
누구에게나 쉽게 벗어날 수가 없는
그런 고통과 아픔이 가까이 있는 거야
포기하려 도망가려 하지 마
너에도 기회는 있는 거야
세상의 끝에서 너에게 손짓하는
절망의 늪을 떠나서 꿈의 미래 속으로
사람들이 만들어간
거짓된 모습으로
단 한 번뿐인 니 삶을
살아갈 순 없잖아
바로 너야 껍데기가 아니야
그래 이제 살아 숨 쉬는 거야
자 이제는 용기를 내는 거야
껍데기가 되어 갈 순 없잖아
세상의 끝에서 너에게 손짓하는
절망의 늪을 떠나서 꿈의 미래 속으로
사람들이 만들어간
거짓된 모습으로
단 한 번뿐인 니 사람을
살아갈 순 없잖아
바로 너야 껍데기가 아니야
그래 이제 살아 숨 쉬는 거야
바로 너야 껍데기가 아니야
그래 이제 살아 숨 쉬는 거야
사람들은 가끔 판단이나 결심이 미치지 못하는 궁극의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 남자의 희망퇴직도 어쩌면 그런 종류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굴지의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다는 건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남자를 아는 모든 사람이 반대했다. 당연히 어머니와 아내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남자는 인생이 외길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했다. 지금 나의 모습이 꼭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항변했다. 어쩌면 부속품처럼 살아가면서 세상을 향해 던지기만 하는 변명보다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허울 좋은 포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남자는 시나위의 노래처럼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이 만들어 놓은 기준, 혹은 남의 시선에 의해 짜여진, 가면을 쓴 껍데기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특히 무대에서 가면을 쓴 광대, 혹은 주는 대로 받아먹고 하라는 대로 공을 뛰어넘거나 앞다리를 들어야 하는 코끼리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남자는 가장 힘들어했다.
세상 어디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랴 만은, 그러고 보면 인생은 가면을 쓴 연극이고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는 건데 더러는 그걸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거다. 아무튼 노래 가사는 그랬다. 누구에게나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힘들게 하지만 그렇다고 남이 정해놓은 대로 살아가지는 말자고, 이제는 살아 숨 쉬어 보자고.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남자는 퇴직 배낭을 메고 시청 앞 건널목을 건너던 그때의 자신을 떠올린다. 그래서 남자에게 시나위의 노래 '서커스'는 가보지 않은 길에 나서는 설레임과 해방감, 그리고 두려움이 공존하는 노래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의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의 여정은 과연 껍데기에 불과한 삶이었을까 반문하곤 한다. 답은 모른다. 그렇다면 이후의 삶은 만족할 만 한가. 여전히 답은 알 수없고 아무도 그 답을 줄 수도 없다. 그러니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은 시나위의 '서커스', 이 노래는 자신이 껍데기라는 자각으로부터 알을 깨고 나오려는 해방의 노래 어디쯤 정도라고만 해두자.
둘, 그렇지만 헤비메탈은 오직 한 길이었다
1980년대 초반, 양재동 말죽거리에 있는 서울고 축제에 다녀온 누나의 입을 빌어 알게 된 기타를 엄청나게 잘 치는 고삐리의 이름이 있으니 그가 바로 한국 헤비메탈의 1세대 신대철이었다. 이미 그 바닥에선 유명했지만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든 아니면 그의 실력 때문이었든 그의 이름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나는 당시 지금의 강남역 옆에 있던 학교를 다녔는데, 이때를 생각하면 먼지 날리는 강남사거리와 칠성사이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피자 프랜차이즈 피자인이 떠오르는 이유다.
메탈 키즈까지는 아니어도 어려서부터 락 음악을 즐겨 들으며 좋아했던 남자도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한다. 남자는 헤비메탈은 물론 하드락이나 프로그래시브락을 즐겨 들었지만 실제로는 REO Speedwagon이나 Asia, Styx 등속의 밴드를 더 좋아했다. 말하자면 남자는 강렬함으로 치닫는 헤비메탈보다는 비교적 소프트하고 이지한 락을 선호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드의 정체성을 결정함에 있어서 헤비메탈은 선택이 아닌 운명이자 당위였다.
원하던 그렇지 않던 밴드의 이름은 뭔가 그로테스크하거나 센세이셔날 하고 파괴적이어야 했다. 그래서 밴드의 이름은 호주밴드 AC/DC에서 힌트를 얻어 High Votage라 했고, 밴드가 연주한 곡들은 Scorpions, Judas Priest, UFO 등의 노래였다. 비록 학교 축제에 참가한 후, 멤버들의 진로 문제로 해체하고 말았던 일회성 밴드에 불과했지만 그저 듣기만 하는 음악이 아닌 직접 즐기는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소중한 순간이었다.
이 시기에 신대철이 시나위를 결성하면서 데뷔 앨범 헤비메탈을 발표한다. 한국 블루스와 펑키, 락의 선구자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헤비메탈을 표방하고 나온 최초의 앨범이기도 하다. 당시 또래 무리에서 입에 오르던 국내 밴드는 시나위를 필두로 강북의 김태원이 이끄는 부활, 조금 나중에 등장한 대구 출신 김도균의 백두산 정도였고, 이미 무당이나 결이 조금 다른 사랑과 평화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헤비메탈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흉내는 내지만 어쩐지 사운드도 가볍고 비어 보이며, 뭔가 묵직하고 하드 한 맛이 부족하다고 느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대주의나 실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악기와 장비, 특히 음향과 같은 환경의 영향이 컸던 탓으로 보인다.
아무튼 1996년 '서커스'가 타이틀 곡으로 실린 시나위 5.5집은 총 5곡이 수록된 미니 앨범이다. 앨범 첫 곡으로 실린 재편집 수록곡 '크게 라디오를 켜고'에서 알 수 있듯이 김바다가 합류하면서 임재범, 김종서 등으로 대표되던 그간의 칼라에서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셋, 다른 길이 있다고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남자의 첫 직장이었던 광고대행사는 IMF 직전에 공중분해되었다. 한때 재계 서열 2위까지 달렸던 그룹의 돈 되는 계열사 하나가 외국 자본의 적대적 M&A에 농락당하면서 이를 방어하던 그룹이 휘청였는데 하필 이때 IMF가 덮치면서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남자는 지인의 권유로 음반기획사를 차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덤벼든 것은 아니었다. 딴따라는 돈을 벌기 어렵고, 가장으로서의 남자는 가족의 생계를 챙겨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창세기 성경 구절이 아니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길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마음가짐은 명확했다. 자신에게는 '가야 하는 길'과 '가고 싶은 길'이 기차선로처럼 평행선으로 놓여있어서 건너편으로는 건너갈 수가 없다고 말하던 남자가, 더 나이 먹고 족쇄가 많아지기 전에 평행선을 한번 넘어보자고 덤벼든 일종의 일탈이었다.
그러고 나서 경력으로 다시 입사한 대기업에서 십수 년을 다니면서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무탈하게 지내오다가 느닷없이 희망퇴직을 신청하고 나온 것이다. 애써 구속된 삶의 경계를 벗어나보려고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평행으로 갈라 선 다른 길, 즉 '가고 싶은 길'을 전력으로 달려 볼 꿈도 꾸지도 않았으니 남자는 어쩌면 평생을 외길로 살아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정해진 길을 벗어나고 싶어 했는 지도 모를 터이지만.
아무려나 시나위는 그때의 시청 앞 건널목을 건너던 남자에게 처럼 지금도 그렇게 말을 건네고 있다. 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다고, 너만 힘든 게 아니니 포기하고 도망가지 말고 기회를 찾으라고. 어차피 인생은 기찻길처럼 정해진 길로 달리는 기차가 아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인생은 나뭇가지처럼 갈라지고, 때로는 낙오하고 때로는 서커스 같이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도 하며, 가끔은 핸들에서 손을 놓아야 할 때도 있다. 원한다고 꼭 계획대로 되는 인생이 어디 있던가. 그런 면에서도 인생은 외길일 수 없다. <終>
음악은 이미지다. 음악은 단순히 소리 뿐만 아니라 공감각적 형태의 소스로 저장되었다가 재생될 때 다시 그 공감각적 형태로 기억을 소환한다. 우리는 이름하여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고, 나에게 추억은 음악을 틀면 활성화되는 이미지 파일들로 저장되어 있다. '그 남자의 음악다방'에서는 음악에 얽힌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추억의 이미지를 통해 소시민적 삶의 단면을 담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