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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나 Nov 14. 2021

서른 즈음에

이부, 이직을 결심하다


막상 tvN 본사에 들어가고 보니 외주 작가로 일할 때보다 더 빡빡하고 섬세한 작업을 해내야했다.

대기업에 가면 더 큰 일을 하는 줄만 알았던 나는 대기업의 구조 속에서 오히려 아주 작은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가 된 것을 실감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영상을 밤새 받아적고 두툼한 문서를 작가님이 보시기 편하게 라벨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찰리 채플린이 말한 인생이란 멀리서 바라볼 때에는 희극, 가까이서 들여다 볼 때에는 비극이라는 것이 꼭 내 삶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실감한 순간이었다.


딸이 대기업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러운 엄마는 종종 친구들과 상암동에 있는 회사 근처로 놀러와 점심을 먹었고, 이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원증을 목에 걸고 방송국 생활을 이야기하는 게 그 당시 어쩌면 유일한 낙이었다. 그것 외에는 사실 전부 따분했고 막막했다. 대기업에 가면 부자가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3년차-5년차 서브 작가가 되어도 고작 300언저리의 월급을 받게 되고 5년차-10년차 메인작가가 되면 여자치고는 고연봉이라는 500-800선 (2017년 당시) 정도를 받게 되지만 그 연차가 되면 방송국처럼 트랜드에 민감한 시장에서는 경쟁력을 잃고 불안한 시기가 찾아온다는 암담한 미래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내가 꿈꿔오던 부자라는 것은 아무래도 매일같이 밤을 새면서 미래를 불안해하는 월급쟁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 수준으로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로 실수가 잦고 형편없는 일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장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도 없었다. 매년 작가가 되고 싶다며 방송국으로 밀려 들어오는 지원자는 세상에 수두룩했다. 글 전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영학이라든지 토익 900점이라든지 하는 경쟁력 있는 이력을 들고 작가가 되겠다며 방송국을 찾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이들은 심지어 색다른 시야를 통해 새로운 판을 구현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부터 글만 써오던 내가 방송국 사무실에 10년동안 앉아 있으면서 신선한 글을 써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 당시 정말 우울한 시기를 보냈는데 퇴근 후에는 종종 한강변에서 다양한 자살 방법들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정말로 스스로를 위험하다고 생각한 순간은 당시 살고 있던 동작구 노량진동에는 고시생들이 많아 종종 보건소에서 길거리로 나와 우울증 검사를 해주기도 하는데 검사 결과 위험 수준이 나와 상담을 권유 받았고 두어번 정도 센터로 나오라고 연락을 받았을 정도였을 때였다. 그동안은 그저 누구나 받는 스트레스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내가 우울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그동안 내가 꿈꾸던 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단 한 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약을 먹는다든지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치료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날 수 있다는 희망의 날개를 부러트리고 얌전히 살든지 기를 쓰고 날아 오르든지 그것은 내가 선택하고 극복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마침 그 때 당시 취재하던 곳 중에 하나가 제주 농촌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이 모인 단체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이하 GJC)였는데 옛날처럼 단순히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재능 있는 청년들이 재능을 살려 고령화된 농촌 지역을 살린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취지도 좋고 컨텐츠도 좋아 컨텍을 몇 번 거쳤으나 아직 신생이라 구체적인 성과가 없다는 이유로 방송 컨텐츠로는 반려되었다.


작가들은 프리랜서이므로 방송 프로그램 시즌을 마치고 자유시간을 얻게 되곤 하는데 나는 이 때 이 GJC라는 단체에서 진행하는 제주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주도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어서 한 번 혼자서 여행으로 가보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곳을 취재하며 보았던 사진이나 영상들 속 청년들이 무척 자유롭고 행복해보였기 때문에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던 중 노래를 부르며 양배추를 수확하는 영상을 보고는 비상구 계단에 쭈그려 앉아 훌쩍훌쩍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2017년 6월, 나의 제주 여행이 시작된다.


처음 제주도에 내려와 GJC의 대표 이사님(이제는 브랜든이라고 부른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부자가 되고 싶은데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러자 브랜든은 나에게 역으로 ‘네가 생각하는 부자가 뭔데?’하고 물었다.


부자는 돈을 많이 버는 거라는 대답에 또 한 번 질문이 들어왔다.

‘네 기준에서 얼마를 벌면 부자가 되는 거야?’

처음에는 나를 시험하는 질문인가 싶어 욕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나 아님 얼마를 불러야 배포가 있어보이려나 등 쓸데없는 시간을 하다 적당한 금액을 부르기로 했다

‘월 500 정도요.’

‘아, 월 500 버는 게 네 기준에서 부자를 말하는 거구나?’라는 질문에 어쩐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동안 내가 되고 싶다는 모습이 무척 추상적이었고 뜬구름같은 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내가 월 500 버는 법을 알려줄 테니까 해볼래?’ 하고 브랜든이 물었다. 그러면서 돈은 월급처럼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벌어내는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잡는 법을 알려줘야하듯 함께한다면 돈 버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는 지금 와 있는 이곳이 어떤 사이비 종교단체나 사기는 아닐지 의심했고 상황을 파악하며 어떤 근거가 있는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래도 일단 나는 방송국 작가 생활을 때려치고 이곳 제주에 더 있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막막했던 나에게 돈을 버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나에게는 엄청난 비전을 가진 도전이었는데 당시 주변 반응은 몹시 처참했다. 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도망치듯 귀농을 결심하느냐는 것이었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는 상황은 다들 많이 겪을 텐데, 브랜든 역시 그래서 경제적 자유와 시간적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이 고민해왔다고 했다. 사업을 크게 키우면 키울 수록 점점 더 바빠지고, 그렇게 되면 좋아하는 해외 여행을 갈 시간이 나질 않으니 여행도 다니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브랜든은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면 둘이서 일 년동안 세계여행을 다니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하려면 어느 누가 내가 여행 다니는 동안 자기 일처럼 운영해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럼 공평하게 한 명씩 돌아가며 여행을 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겠다.’ 누군가가 빠져도 일이 돌아가고, 각자가 일한 만큼 벌어가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체는 제주청년농부 라는 컨텐츠를 중심으로 창업을 희망하는 청년들이 각자의 사업 영역을 구축하고, 함께 협업하는 구조로 아직은 사람들에게 많이 낯선 ‘협동조합’이라는 구조로 운영을 시작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시스템과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곳에서 내 컨텐츠를 만들어 직접 돈을 벌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내 나름 짱구를 굴렸을 때에는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략이었다. 당시 작가들 사이에서는 효리네 민박이라는 프로그램이 시작될 예정이라며 작가를 구하던 차였는데 그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나면 제주도가 한층 더 이슈가 될 것이었다. 애월에서 지디가 몽상 드 애월 카페를 통해 제주가 청년층 사이에서 여행지로 막 떠오르던 그 무렵이었다. 게다가 JTBC같은 종편 방송국들이 생긴 데에 뒤이어 개인 아프리카 tv라든지 유튜브 시장이 열리던 차였는데 이런 개인 방송이 나오기 시작하면 몸집이 크고 절차가 복잡한 방송국은 점점 더 승산이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방송작가로 활동하는 것보다 이곳 제주에서의 생활을 통해 훨씬 더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극장이나 다큐3일 등 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도 했는데, 내 실력이라는 게 글만 놓고 전국에 잘 쓰는 사람들과 놓고 비교해 보았을 때는 승산이 없을 수도 있지만 농촌에서 글을 쓰는 것은 내가 거의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방송 속 내용이 궁금하다면 인간극장 4848회 거침없이 청춘 편을 보시면 됩니당..:-)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의 제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이제 와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한다. 문득 본질적으로 내가 되고 싶고 꿈꾸던 모습을 다시 그려보기 시작하면서 어쩐지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과 약간은 틀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정말 우연히 벌어진 일이다.

감귤을 수확할 때면 이어폰을 꽂고 종종 오디오북을 듣고는 하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오랜만에 시크릿을 한 번 더 듣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내가 꿈꿨던 삶에 대해 곰곰히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었던 거지?’


처음 브랜든과 약속했던 월 500만 원 정도를 벌게 된 지금, 나는 제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기로 마음 먹고 이곳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500만 원이라는 돈을 벌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이곳 제주에서 그려가는 삶 역시 건강하고 행복하며 멋진 것이 사실이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화려한 도시에서의 삶을 꿈꾸는 것이 분명했다.


정리를 하면서 글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하는 일이기도 하고, 필요한 작업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실패의 기록시리즈가 나오게 되었는데 아직 목표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실패의 기록들이기도 해서 스스로 돌아보기에도 좋을  같고 한편으로는  기록들이 누군가에겐 도움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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