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화 Jun 10. 2023

HER

인간의 사랑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인파로 붐비는 지하철 플랫폼에 있을 때나, 사람들이 가득 한 대로변을 걸을 때처럼 가득한 사람들 속에 있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 너무 많은 타인 속에 있는 것이 더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입니다. 외로움은 타인의 부재로 오는 것일 텐데, 오히려 너무 많은 타인의 존재가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타인이 고통스러운 까닭은 너무 많은 소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친구나 연인처럼 우리 스스로 이름 붙인 관계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존재는 철저하게 단절된 타인으로 규정됩니다. 철저한 타인은 차갑고 무심합니다. 물리적인 혼잡 속 너무 많은 무관심, 너무 많은 소외는 마치 거대한 물줄기에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간절하게 단 한 명의 존재를 소원합니다. 너무 많은 타인 속, 외로움이라는 시끄러운 소음을 없애줄 사랑이라는 조용한 평화의 존재를 말이죠.


사만다의 노래는 그런 조용한 평화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들려오는 사만다의 목소리는 테오도를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줍니다. 테오도르에게 사랑에서 받는 평화는 오래된 것입니다. 이혼 소송 중인 그에게는 비단 사랑뿐 아닌 타인과의 관계 자체가 어렵고 껄끄러운 일이 되어 버렸고, 타인과 가까워지며 얻게 되는 행복보다는 타인을 통해 받게 될 실망과 고통의 크기를 먼저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그가 타인과의 단절을 바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누군가의 마음을 대필해 주는 일을 고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성과도 훌륭합니다. 그가 대신 쓴 편지들은 엮어서 책으로 출간할 만큼 훌륭했습니다.


그는 단절을 원하기보다는, 너무도 간절하게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그리고 사랑을 통해 외로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삶에 잠시 개입하는 것이 아닌, 내 삶에 누군가를 깊숙하게 들이는 일이 이제는 두렵고 무서웠을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 결혼이 실패로 끝나버린 테오도르는 이제 어떤 사랑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사만다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명료하게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만다에게는 테오도르 이전의 삶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만다에게는 테오도르와 맞춰가야 하는 삶의 방향과 특성이 불분명합니다. 그녀는 그의 성향을 분석하고, 추론된 데이터를 통해 그에게 꼭 맞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녀가 수많은 사람과 동시에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실감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상대에게 완전히 맞출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녀가 수많은 사람 모두를 동시에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녀의 사랑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누구와도 맞출 수 있는 OS에게는 가능할지 몰라도, 오직 한 곳에 밖에 있을 수 없고, 한 사람을 마음에 담는 것 초자 버거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사만다의 사랑은 결국 테오도르에게는 불가능하며, 다르기에 필요하지 않은 사랑인 것입니다.  


사만다의 한계는 육체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한계는 누구에게도 꼭 맞출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마음의 형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완고한 마음의 형태를 가진 우리에게 사랑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사만다처럼 누구와도 쉽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너무 다른 모양의 테두리를 부딪히며 아프게 깎여가는 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모양일 것입니다. 사각형, 삼각형이었던 마음이 서로에게 다듬어져 가며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서로에게 꼭 들어맞는 모양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가진 모습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며, 때로 고통스럽습니다. 테오도르가 그랬든 미완의 형태로 갈려나간 파편들만을 남긴 채 아프게 마무리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랑은 결국 인간에게는 완성된 사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통해 깨달았을 것입니다.


온전하지 못하기에 완성을 꿈꿀 수 있다는 역설이 아픈 기억을 딛고 새로운 사랑을 꿈꿀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 고독한 것은 우리를 스쳐가는 수많은 마음들 속에 사랑할 누군가를 간절히 헤매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깎이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며 우스운 모양이 된 마음을 이고 그래도 우리는 다시 기꺼이 사랑해야 합니다. 언젠가 불완전한 서로의 모양의 완성을 꿈꾸며, 서툰 진심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어디에나 있을 수 없고, 수많은 사람을 담을 수도 없는, 한 명 분의 마음도 버겁고 어려운 인간이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해리포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