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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Dec 31. 2023

아듀 2023

231231

2023년이 다 갔다.


며칠 동안 연이어진 송년회 자리를 뒤로 하고 올해의 마지막 날 모니터 앞에 앉았다. 공기가 고요하고 서늘하다. 올 한 해 나는 잘 살았을까.


업무적으로 부족함을 자주 느꼈다. 본부가 바뀌면서 업무의 성격이 달라진 게 컸다. 기존에 있었던 부서에 비해 단위 사업의 예산이 큰 이곳은 보다 많은 형식과 절차를 요구했다. 기획의 참신함이나 운영의 창의성보다는 필요한 절차가 누락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역량이 필요한 곳이었다. 한 마디로 행정 업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곳이다. 그 부분에서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맞나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 업무가 진척이 없거나 내가 또다시 잔실수를 했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라디오헤드의 노래가 머릿속에서 자동재생되곤 했다.

부서 배치로부터 364일이 지난 이제 조금은 이곳에 적응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젝트 단위로 돌아가는 사업을 4개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해 보니 업무에 자신감도 붙었다. 무엇보다 내가 담당한 사업에 참가한 기업이 해외 전시회에서 바이어와 만나고 샘플 판매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수출 계약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뿌듯함이 좋았다. 부서 성격에 맞추어 개인적인 업무 스타일도 보다 구조적으로 변했다. 예전에는 사업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는 게 내가 일을 잘하는 방식이라고 믿었다면 올해는 보다 차분하게 전체 그림에 맞게 필요한 절차를 밟는 것을 배웠다. 업무적으로 성장하면서 성격도 함께 맞물려 조용히 가라앉는 방향으로 시나브로 변했다.


현대무용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무용은 항상 해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 동생이 레오타드를 입고 토슈즈 챙겨 발레 학원을 가는 모습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대학교 들어와서는 '댄싱 9'이라는 댄스 오디션 프로그램을 봤는데 거기서 남자 무용수들이 현대무용을 하는 걸 보고 언젠가 꼭 해야지 다짐했었다. 막연했던 동경을 실천으로 옮겨 6개월 간 몸을 움직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 평생 운동을 해와서 할만하겠지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몸의 언어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 내년에도 쉬지 않고 할 것이다.

몇 주 전에는 혼자서 마라톤 풀코스도 뛰었다. 20km만 뛰어보자는 생각으로 나갔는데 생각보다 할만해서 까짓 거 하면서 달려봤는데, 마지막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게다가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던 날이라 나름 따뜻하게 입고 나갔는데도 후반부에는 팔이 얼어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내년 목표로 세웠던 풀코스를 미리 한번 경험해 봤다는 게 기분이 썩 좋았다. 사실 풀코스만 생각하면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곤 했는데 그걸 깨부쉈다는 게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었다. 나이키 앱을 켜보니 일 년 동안 767.5킬로를 뛰었다. 내년에는 더 꾸준히 뛰어서 매달 100킬로를 달성하는 게 목표다.


태어난 지 꼭 30년이 된 해가 다 갔다. 아쉬운 게 아주 없지는 않지만 다시 살더라도 딱 이만큼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에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보다는 스스로에게 깊이 수렴하고 싶다.

저녁 약속을 줄이고 도서관을 자주 갈 것. 운동과 현대무용은 꾸준히 할 것. 내가 할 일에 몰입하면서도 뒤따라오는 타인에게 문을 잡아주는 배려를 잊지 않을 것. 2024년. 숫자가 이쁘게 딱 떨어지는 해다. 

잘 부탁한다 2024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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