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 정신과를 찾아갔을 때는 ADHD가 아닌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등을 의심했다.
참을성도 없긴 했지만, 그보다 불뚝불뚝 화가 나고 우울했기 때문이다.
답답했다. 오랜 기간 나의 분노와 우울에 대한 납득 가능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는 핀셋 하나 때문에 하루 종일 화를 낸 적이 있다. 입 옆으로 간신배처럼 뾰족이 난 긴 수염이 내 신경을 거슬렸는데 편의점에 이 놈을 뽑기 위한 핀셋이 없었던 것이다.
소개팅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수염 한 가닥이 그렇게 신경이 쓰였던 것인지 모르겠다. GS, 이마트, CU를 다 들렸다.
있던 약속까지 취소하고 주변 마트까지 싹 다 뒤졌다. 그리고도 찾지 못하자 바닥에 거꾸로 누워 주먹질을 해댔다. 손에 작은 멍이 들었다.
비슷한 일이 많았다.
이어폰을 잃어버렸다고 일을 나가지 않거나, 모자가 없어졌다고 하루 종일 누워있거나, 은행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6시간을 끙끙 싸매는 등. 별 일 아닌 것에 화가 나고, 우울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등을 진단받았었다. 약도 먹었었다. 졸려지는 약, 의욕이 없어지는 약, 멍해지는 약. 그런 이름도 기억 안나는 약을 처방받아 한동안 차려 먹었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여전한 증상 위에 회색 안개 같은 차분함만이 더해진 기분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멍했으나, 이상한 일에 집착했고, 화가 났다.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그러다 성인 ADHD를 발견했다. 아마 어떤 유튜브 영상이었던 것 같다. 10분 남짓 영상을 정독하고는 마치 나를 정확히 설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괴롭혀 온 지루함. 무력함. 분노. 그런 것들이 정말 치료될 수 있는 걸까? 그런 희망에 들떠 정신과로 갔다.
“선생님. 제가 우울증이 아니라 ADHD인 것 같아요. 인터넷에서 다 찾아봤는데 소름 돋게 다 맞더라고요.”
선생님은 5초 정도 정적으로 일관하시더니 냉정한 표정을 꺼내셨다.
“그건 근데 모르는 거라서 검사를 한번 해봐야 해요.”
그리고는 두 시간가량 게임 같은 검사를 마쳤다.
화면이 깜박거리면 스페이스바를 누르거나, 별이 세모로 바뀌면 클릭을 해야 했다.
이후 긴 설문조사지도 작성했다.
다음날 찾아간 병원에서 나는 공식 ADHD 진단을 받았다.
“성인 ADHD가 맞는 것 같네요. 억제 지속, 간섭 선택, 분할 등 다수 분야에서 ‘저하’ 혹은 ‘경계’가 나왔어요.”
걱정이 되거나 부끄러울 만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솜이불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아, 이거구나. 이것만 고치면 내가 좀 살만 하겠구나.’
무료함에서 비롯된 이유 모를 무기력함과 분노가 내심 불편했던 터였다.
그래서 ADHD라는 진단이 반가웠다.
드디어 제대로 알고 치료를 받게 되겠구나 하면서 말이다.
실제 많은 ADHD 환자들이 우울증과 같은 ‘공존질환’의 의심을 받으며 치료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유는 의사 선생님 말에 의하면 우울증이나 분노조절장애 같은 공존질환이 더 “뚜렷해서”라고 한다.
“참을성이 없고, 충동 조절이 안 되는 것이 본 원인이더라도 그것의 결과로써 화가 나고 우울해지니까 그렇게 진단을 하는 거죠.”
“전문가도 병원에 우울해 죽겠다고 찾아오는 사람한테 우울증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진짜 원인보다 결과가 뚜렷해서 생기는 오해예요.”
생각해보니 이해가 됐다.
나의 분노는 다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그런 것들도 어느 정도 맞지만.
그 기저에 ADHD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울하고 화를 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참지 못하고 충동적인 것’이 진짜 문제였다.
사소한 일이라도 참으면 우울하고, 화가 났다.
참지 않으면 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탓에 우울하고 화가 났다.
화가 나고 우울한 삶이었고, ADHD가 원인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