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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해 May 02. 2020

DAY+15 / LAST NIGHT IN BONDI

 하루 종일 비가 많이 내렸다. 집을 나서면서 비 오는 걸 확인했지만, 번거롭게 우산을 들고 싶지 않았고 어차피 바로 카페를 찾아갈 거라 모자만 눌러쓰고 나왔다. 도서관 앱이 고장 나는 바람에 이어 읽지 못했던 책이 너무 읽고 싶어 이것저것 하다가 미희의 도움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초반의 몇 장에 온통 마음이 뺏겨서, (너무도 새로운 주거 결합이었다) 이 언니들이 어떻게 같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하겠는 그런 이상한 마음이었다.

 좋아하는 카페의 야외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따뜻한 플랫-화이트를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이따금 바람 따라 빗방울이 날아들었지만, 마음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정말 행복하고 따뜻했다. 느긋하고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이 곳 본다이 비치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러 나섰다. 비가 거칠었지만 정말 이 해변에서 맛있는 오일 파스타가 너무 먹고 싶었다. (왜 자꾸 오일 파스타가 먹고 싶은 지 나도 모르겠다)

엔젤 헤어

 구글 맵으로 동네의 모든 파스타집의 리뷰를 비교해 보고 비교적 비슷한 입맛을 가졌을 한국인의 좋은 리뷰가 있는 가까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갔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화이트 와인 한 잔과 조개가 들어간 엔젤 헤어를 주문했다. 엔젤 헤어는 들어본 적만 있는 파스타 면의 이름으로 천사의 머리카락처럼 면이 꼬불거리고 얇다는 것만 알고 전혀 먹어본 적은 없는 파스타였다. 먼저 나온 와인을 홀짝이며 거리를 바라봤다. 꽤 비가 꽤 내리는데도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받은 파스타는 먹음직한 비주얼이었다. 활짝 입 벌린 도톰한 조개 위로 노란색 바삭한 가루들이 듬뿍 올라가 있었다. 스푼으로 국물 맛을 먼저 보니 원하는 바다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면. 파스타를 한 번 뒤섞으니 면이 뚝뚝 끊어지며 떡이 진 채로 포크에 올라왔다. 단 한 번의 포크질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맛이 없을 거야. 먹기도 전에 실망감이 밀려와 입맛이 썼다. 와인으로 입을 축이고 파스타를 먹었다. 예견한 바로 그 맛이었다. 다행히 와인은 꽤 맛있었다. 와인과 함께 조갯살만 골라 먹고 본다이 비치 마지막 만찬을 끝냈다.

 내일은 본다이 비치를 떠나는 날이라 짐 정리를 해야 했지만, 비를 뚫고 만난 마지막 식사가 너무 입에 안 맞아서 다 귀찮아졌다. 누워서 아이패드로 낙서를 하며 노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아이 목소리와 들뜬 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충 들리는 이야기로는 친구 가족이 오래간만에 들리러 온 것 같았다. 에어비엔비의 가장 큰 장점은 현지 주민인 호스트와의 교류인데, 일과 사람에 치이다 넘어온 나는 교류보다 혼자의 시간과 휴식이 절실했다. 첫 숙소를 그저 호텔에 온 냥 머물렀던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마지막이니 나가서 인사하고 어울려볼까 잠깐 망설였지만 그냥 방콕.


백팩커스 vs 셰어 하우스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카카오톡 대화를 신나게 하고 있는데, 띠링하고 휴대폰 문자 소리가 들렸다. 기존에 머물던 사람이 하루 더 빨리 나가기로 해서 원하면 내일 오후부터 입주할 수 있다는 내용의 울티모의 관리인 문자였다. 갑작스러운 문자로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본다이와 울티모의 체크아웃-인 사이의 1일을 위해 백팩커스를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그것도 이 하루의 홈리스 상태에 환불불가 상품인 혼성 8인 도미토리에 약 31달러에 결제까지 마쳐 놓았다. 밤 10시 넘어 도착한 이 갑작스러운 문자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괜히 연락을 늦게 준 관리인을 탓하는 마음도 들었다가(물론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낫지 싶다가, 이도 저도 다 귀찮은 마음에 신경질이 났다.

 안 그래도 캐리어 2 백 팩 1 큰 손가방 1(산 게 없는 데 짐이 늘었다.)인 이 만만치 않은 짐을 들고 백팩커스의 2층 계단을 오르고, 모든 곳이 개방된 공용 도미토리에서 지켜내는 것도 걱정된 참이었다. 또 다음날 엔 그 짐을 다시 1층으로 내려서 10분 거리의 셰어 하우스로 가는 것도 아득해졌다. 애써 잊어버리고 있던 문제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래서 여행을 많이 다닌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모두 3만 원을 버리고 편하게 들어가느냐, 도미토리를 체험해보고 노동을 할 것이냐. 대부분의 친구들이 전자를 선택했다. 짐과 함께 이틀 동안 낑낑대고 흥과 술에 취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는 것에 대한 비용이 3만 원 보다 훨씬 크다는 경험자들의 말에 바로 수긍했다. 그래, 늙었는데 몸 쓰지 말자. 그냥 3만 원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바로 택시를 타고 셰어 하우스로 입주하기로 했다. 실은 도미토리를 예약한 건 이 참에 내가 셰어 룸을 쓸 수 있을 지에 대한 경험을 해보고자 함이었는데 아무래도 내 공간이 하나도 없는 건 안 되겠는 것 같다. (사실은 외면하고 싶지만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주님도 알고 계신 것 같다.) /05MAR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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