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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재민 Aug 27. 2020

#내것 #06 - 2020년 백호 다이어리

텅 빈 작년 다이어리에 미안할 즈음 새해 다이어리가 나타난다


대한축구협회 건물 2층에 기자실이 있다. 축구 담당 기자들이 이곳에서 업무를 본다. 국내 축구의 가장 큰 건수는 역시 국가대표팀이다. 협회 건물에서 종일 머물다 보면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다. 5층에는 K리그를 돌리는 한국프로축구연맹도 있다. 일 보기 참 편하다.


올 초 광화문에서 볼일이 있었다. 협회와 연맹의 지인들도 볼 겸 기자실에 짐을 풀었다. 기자실 바로 옆방에 협회 홍보팀이 일하는 공간이다. 홍보팀장은 협회에 입사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업계 친구다. 카톡을 보냈다.


놀자.

지금 어디?

뒤에서 봐.

10분만 있다가 갈게.


기자실에는 소파도 있고 커피도 있고 음료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를 기자실 안으로 부를 순 없다. 기자 소굴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으려는 홍보 담당자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홍보팀의 주된 업무는 ‘언론 및 기자와 잘 지내기’다. 그래서 대개 홍보 담당자는 기자들을 싫어한다. 사회생활 경험자라면 왜 그런지 쉽게 추측할 테니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뒷마당 벤치에 앉는다. 운 좋게 협회 더부살이에 성공한 길냥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정보 수집 같은 건 없다. 친구끼리 커피 마시며 수다 떠는 게 전부다. 설사 뭔가 있다고 해도 친구 앞에서 기자 행세를 하고 싶지 않다. 각자의 세상에서 쌓인 불만을 서로에게 풀어낸다. 국가대표팀이 패한 다음날 민원 쇄도로 홍보팀 전화통이 불타오른다. 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다시 데려오지 않느냐는 무명씨의 욕설을 듣기도 한다. 대한축구협회 홍보팀은 스트레스가 굉장한 부서다. 그럴 때마다 내 귀를 친구에게 빌려준다. 여기에다가 쏟아내라고. 화병 걸리지 말고.


오랜만에 노닥거렸다. 친구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다른 볼일을 본 뒤 기자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다이어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대한축구협회 2020년 다이어리. 얼마 전 발표한 국가대표팀 새 원정 유니폼에 적용된 백호 무늬가 다이어리의 앞뒤를 감싸고 있었다. 새로 바뀐 협회 엠블럼은 금색. 발표 당시부터 파격적인 디자인 변화는 팬들에게 여한 없이 까였다. 내가 이상한 건지, 내 눈에는 근사해 보였는데 말이다.


친절한 친구 덕분에 2020년에도 이렇게 다이어리가 생겼다. 내지 구성을 보니 심플해서 마음에 들었다. 올 한 해 12개월치 캘린더가 12페이지에 걸쳐 인쇄되어 있었다. 올해 예정된 국가대표팀의 주요 일정도 촘촘하게 표시되어 있다. 나머지는 필기 용도의 내지가 채워졌다. 다이어리보다 공책에 가까웠다. 그게 마음에 든다. 어차피 나의 모든 일정은 구글캘린더에서 처리된다. 심지어 아이폰3가 출현하기 전에도 나의 다이어리 평가 기준은 마음대로 끄적일 수 있는 페이지의 분량이었다. 2020년 백호 다이어리는 합격.


학생 시절, 기억에 남는 다이어리가 있다. 위아래로 긴 수첩이었는데 색깔은 녹색, 표지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로고와 학교명이 적혀 있었다. 몇 년 뒤 ‘이대 나온 여자’가 될 친구들은 예외 없이 그 ‘이대수첩’을 사용했다. 그 수첩을 사용하지 않으면 학점에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학칙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비염이 있었던 나는 늘 백팩에 휴대용 티슈를 넣고 다녔는데 내가 아는 이대 친구들의 핸드백에는 항상 이대수첩이 들어 있었다. 2020년에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다이어리를 받을 때마다 항상 다짐한다. 올해야말로 다이어리를 과학적으로, 프랭클린적으로 쓸 테다. 블로그를 검색해본다. 다이어리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혼자 감탄한다. 방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형광펜을 갑자기 찾아 나선다. 그리곤 지금껏 다이어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용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캘린더 페이지들도 특정 기간이 텅 빈 채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보신각 종소리를 듣는다.


아까우니까 지금이라도 써야겠다고 할 때쯤 새해 다이어리가 어딘가에서 척 나타난다. 네이버가 만드는 다이어리가 참 예쁘다. 재활용지 박스를 해체하면 옅은 녹색 다이어리가 나온다. 예쁜 다이어리가 내 손에 있어봤자 순백 상태로 해를 넘길 게 뻔하다.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덕분에 나는 친구가 주는 네이버 다이어리를 매년 아내에게 상납한다. 다행히 아내는 네이버 다이어리를 좋아한다.


기자에게는 사실 다이어리보다 기자수첩이 요긴하다. 누군가 빠르게 뱉어내는 말을 재빨리 주워 담는 용도에는 묵직한 다이어리보다 날렵한 기자수첩이 딱이다. 바지 뒷주머니에 쏙 들어가고 한 손으로 척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속기법에 능통한 선배들도 있었다. 속기로 적은 기자수첩은 대영박물관 로제타스톤을 보는 것처럼 근사한 동시에서 해석 불가능했다. 요즘 친구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엄지로 녹취를 따낸다. 그들의 엄지 무브먼트는 현란해서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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