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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연히 Oct 22. 2023

웹툰 작가 지망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1) 조금만 더 늦게 퇴사할 걸


 문제는 돈이다. 만화를 그리려면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퇴사’란 언뜻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웹툰 작가 지망생이어도 만화를 먹고 만화로 씻고 만화를 덮고 잘 수는 없기 때문에 실생활에 쓰이는 돈이라는 녀석이 필요하다.

 퇴사를 말리는 상사들의 눈빛을 외면하면서도 불안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름대로 자금을 확보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까고 보니 데뷔는 묘연했다. 그렇다고 쪼개고 아껴 쓰기만 할 수도 없었다.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됐기 때문이다. 돈은 김장 날 보쌈고기를 썰 때처럼 숭덩숭덩 잘도 떨어져 나갔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갑작스러운 지출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도 가끔씩 회사에서 가장 높은 %로 연봉이 인상됐던 그날이 기억난다. 오른 월급을 겨우 두 달 받고 회사를 그만뒀다. ‘아, 그 돈이면 N개월만에 얼마 모을 수 있었을 텐데….’ 아까워 죽겠어도 어쩌겠는가. 이미 내가 돈 대신 시간을 선택했던 걸. 그 시간마저 알차게 쓰지는 못했지만.



2) 시간을 길게 잡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울 걸


 문제는 초조함이다. 번듯한 완성본을 뚝딱 그려내는 만화가가 하루빨리 되고 싶은 마음에 기본은 무시하고 괴발개발 그려댔다. 지금 보면 귀가 왜 여기 붙었고 손끝은 또 왜 저기 가 있는지 미스터리다. 기초를 쌓지 않으면 운 좋게 데뷔한다 쳐도 금방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왔다는 자신감은 웹툰 인생의 든든한 뼈대가 되어 골다공증 없이 무병장수하게 해 줄 것이니, 책이나 학원, 온라인 강의 등 각자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공부를 시작하자.

 … 일단 나부터 시작하자.



3) 두려움에 정면으로 직면할 걸


 혹시 데뷔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외면해 왔다. 바로 뒤에 있어 들숨날숨 다 느껴졌으면서도 못 본 척했다. 그렇게 따돌리려고 노력해 봤자 두려움은 어떻게든 존재감을 과시한다. 자꾸만 꿈을 꿨다. 연습 없이 장기자랑 무대에 올라가거나 갑자기 시험을 치르는 등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불편한 꿈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깨어 있을 때 마음껏 무서워하는 게 낫다. 두려움도 솔직하게 마주하면 예의상 덜 날뛴다. 일기에 감정을 털어놓거나 한숨을 쉬는 등 감정을 배출해 보자.



4) 이것저것 욕심 내지 말 걸


 갓생 열풍이었다. 갓생 브이로그를 치면 스크롤이 끝도 없다. 일도 공부도 취미도 연애도 운동도 인간관계도 다 잘 해내는 그들을 보면 스멀스멀 욕심이 피어오른다.

 결혼하고 연고 없는 지방으로 가는 바람에, 친구 만나는 시간까지 사라지면서 하루가 방대해졌다. 그래서 나도 갓생 유튜버들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영어공부하고 필사하고 명상하고 책 읽고 나서 진짜 하루를 시작하는 계획표를 짰었다. 하지만 다 잡으려다 다 놓쳤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들처럼 육각형 천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하루에 웹툰 그릴 시간을 정해 놓고 남는 시간에 뭐든 하는 건 좋지만, 음, 남는 시간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5) 완결을 내볼 걸


 빨리 데뷔하고 싶은 욕심에 작품 하나가 데뷔 가능성이 없어 보이면 바로 버리고 다른 작품을 새로 짜곤 했다. 그러다 보니 부끄럽게도 현재 완결을 낸 작품이 하나도 없다. 책 <그릿>에 보면 감독이자 작가인 우디 앨런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지켜보니까 작가가 꿈이라고 말하지만 첫 단계에서 실패하고 실제로는 희곡 한 편, 책 한 권 쓰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이에 비해, 일단 희곡이나 소설 한 편을 실제로 완성한 사람은 뒤이어 연극으로 상연하거나 책으로 출간하더군요.” 네, 반성합니다, 작가님. 알겠습니다, 감독님.



6) 완벽주의는 갖다 버릴 걸


 내가 보기에 완벽주의의 정의는 뭐든 완벽하게 해내고야 마는 ‘능력'이 아니라, 뭐든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하는 ‘바람’, 심하게 말하면 '욕심'에 가까운 듯하다. ‘완벽’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해내는 능력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지금 내 필명인 ‘당연히’는 처음부터 지녀온 이름이 아니다. 베스트 도전에 올리던 작품이 지나고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삭제하면서, 필명으로 만든 아이디도 같이 없애는 과정을 몇 번 거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내 발전의 과정들인데, 너무 홀대한 것 같아 작품들과 필명들에게 미안하다.

 애초에 완벽할 수도 없지만, 완벽할 필요도 없다. 유일하면 될 일이다.



7)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 걸


 사람은 위험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타고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웹툰 작가 지망생들은 혼자 작업하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지기 쉽고, 이는 자연스레 부정적인 방향으로 뻗어 나갈 위험이 있다. 나는 원래도 생각이 많은 앤데 혼자 있는 시간이 남아 돌다 보니 그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당시에는 ‘뭔 개소리야’하고 넘겼던 무례한 말들이 갑자기 진지한 상처가 되기도 했다. 범람하는 생각들로 한동안 마음고생 깨나 했다.

 이제는 노하우가 생겼는데, 나쁜 생각이 들 때마다 몸을 움직여주면 좋다. 예를 들어 마치 누가 카메라를 들이댄 듯 흐응♡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잔뜩 올린다거나, 무언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박수를 치는 식이다. 행동과 감정은 동시성이 있다고 한다. 몸을 기분 좋은 듯 움직이면 마음도 깜빡 속아줄지 모른다.



8) 더 많이 함께 할 걸


 외로웠다. 하루는 너무 쓸쓸해서 혼자 일하는 사람들에 관한 책을 찾아보다가 ‘리베카 실’의 <솔로 워커>라는 책을 발견했는데 부제가 <미치지 않고 혼자 일하는 법>이었다. 그렇다. 혼자 일하는 건 원래 미치지 않으면 다행인 행위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만나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남편 한 명인 나날의 연속이었다. 결혼하면서 원래 살던 곳을 떠나온 탓에 친구도 없었고 새로 사귀기엔 자기 소개할 때 또 무직이라고 해야 하는 게 생각만 해도 번거로웠다. 남편은 내가 걱정돼 ‘장인 장모님 은퇴하셔서 낮에도 집에 계시니까 몇 주간이라도 다녀오라’고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요즘엔 남편 직장이 서울로 발령 나 이사할 집을 알아보다 시간이 떠서 그때의 남편 말대로 부모님 댁에서 지내고 있다. 막상 살아보니 혼자일 때보다 훨씬 좋다. 가족들과 제때 아침밥을 먹고 집 밖으로 나와 작업에 집중하다 저녁엔 또 할머니와 엄마 아빠, 남편과 식사하는 북적북적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소속 없이 혼자 걸어가는 길, 함께 일하는 사람은 없어도 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있으니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봐도 좋을 일이다.




 잔뜩 후회하는 것처럼 써 놓았지만 사실 그때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다 있었을 것이다. 뭐든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직접 경험하고 깨지며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모두들 너무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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