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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Nov 18. 2023

3합 8

[오늘도 나는 감탄 사寫] 1



선생님~ 선생님~


고개 숙여 다른 업무를 보고 있는데, 저기 문 앞에서부터 나를 찾는 목소리가 다가왔다. 힘껏 달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잰걸음이 느껴졌다. 담당에게 보낼 업무상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느라 바로 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3월 2일 첫날부터, 엊그제까지 일주일에 서너 번 만난 벼리(가명)라는 것을. 엘지 트... 아닌 우리 학교 유일한 트윈스인 여리와 벼리. 여리가 언니, 벼리가 동생. 둘 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 한국지리를 선택한 반의 학생이다. 성적은 둘 다 3등급 초반 정도.


미세먼지, 황사, 무더위, 장마를 지나면서, 3월, 4월, 1차 지필평가, 6월, 2차 지필평가, 9월, 10월 모의수능을 거치면서 서서히 언니 여리는 밀려나기 시작했다. 수업은 그럭저럭 따라오는데 수능 준비는 많이 힘들어했다. 그래도 복도에서 나를 만날 때마다 멈춰 서서 반듯하게 배꼽인사를 했다. 벼리가 늦게까지 방과 후 수업을 듣고 있을 때도 복도에서 동생을 가끔 기다리면서.


벼리는 방과 후 수업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지 열흘이나 지나갈 무렵 개인적으로 찾아왔다. 어제 나에게 찾아온 잰걸음보다 오분의 일은 느릿하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반듯하게 서서 부탁하기 시작했다. 신청 기간을 놓쳤다고, 정말 해보고 싶다고, 잘해보고 싶다고. 나는 벼리의 눈빛을 보고 바로 결정했다.


그렇게 벼리는 내 수업을 따라 듣기 시작했다. 의례 그렇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 안 나오는 성적에 허덕이고, 스스로를 밀어내고, 이런저런 다른 이유를 만들어 내는 아이들 틈에서 벼리는 첫날의 약속처럼 정말 열심히 했다.


어느 날은 수업 끝나고 늦은 방과 후 수업을 하는데 옆에 학생이 그랬다. 벼리는 정말 대단하다고. 아침에 등교해서 감기몸살로 조퇴했다는데, 오후에 약 먹고 좀 누워있다 괜찮아지니까 다시 나왔다는 거였다. 평소 수업 시간에 자주 질문하는 건 기본. 주말이 지나면 어김없이 한 두 문제를 물으러 와 나를 제대로 가르쳤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벼리는 항상 겸손했다. 나한테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매 순간 느끼게 만들어 준다. 어린 10대에게 늘 배운다는 게 이런 눈빛이지 싶게 만들어 다. 퇴근하고는 쓰러지지만 벼리 앞에서는 허리 통증도, 오래 서 있는 것도 견딜만할 정도로. 그래서 조금 더 남아도 괜찮고, 몇 번을 물어도 괜찮고, 정해진 20시간의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도 다음 방과 후를 기다리는 간에도 계속 수업을 이어가고 싶은, 그래서 실제 다른 4명의 아이들과 함께 그렇게 했던 벼리다. 엊그제 수능 전날까지도.


그러는 사이 나와 문제집을 세권이나 풀어냈다. 특강 - 완성 - 파이널로 이어지는 한 세트를 제대로 완독 하는 학생은 사실 드물다. 그런데 벼리는 이 완독을 나하고 한번, 스스로 한번 두 번을 해냈다. 많이 틀리고, 실수하고, 잔소리 듣기를 반복하는 동안 벼리의 모의고사 성적 시작은 28점이었다. 사회탐구 한 과목의 원점수 만점은 50점이다. 그런데, 글쎄 어제 47점을 받아 왔다. 지금껏 최고 성적이었다.


킬러 문항 운운하면서 결국 불수능이 된 올해 수능에서 보면 만점에 가까운 점수다. 특히, 28점이라는 점수에서 약 6개월 만에 만들어 낸 47점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참 오랜만에 만난 벼리다. 나를 보면서 신나 하는 벼리가 마지막에 다시 한번 나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그런다. 쌤, 저 3합 8 맞췄어요, 맞췄어.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라고.


서울에 있는, 꼭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의 수능 최저 기준이 3합 8이었던 거다. 3합, 즉 세 개 영역(국어, 수학, 영어, 탐구 중 택 3)의 수능 합계 등급이 8등급 이내면 1차 합격이라는 의미다. 물론 그렇게 최저 기준을 통과한 지원자들의 총점으로 순위를 다시 매기는 마지막 단계가 지나야 최종 합격이다. 하지만 올해처럼 체감 난도가 높아지면 최저 기준을 충족 못하는 학생들이 교실에는 의외로 많다. 해가 갈수록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훌쩍이는 아이들을 보는 건 더 어렵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올해 수능의 필적확인란 문구다. 이 문구 그대로 벼리의 앞날에 넓디넓은 길이 펼쳐지길 기원한다. 다시, 또 다른 벼리를 만나고, 힘들어하는 리를 더 도와주기 위해, 올 교재도 다시 업데이트를 시작해야겠다. 그런 시작을 다짐하는 마음이 올해는 유난히 가볍다. 다 벼리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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